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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군산시)를 이끄는 해병대 지도자

기사승인 2021.10.06  1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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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봉(해병 256기) (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 이사장

▲ 김기봉 전우(재)군산사회복지장학회 이사장, 전북해양소년단 연맹장, 1992 군산시해병대전우회장, 1994 군산시민장, 2006 국무총리표창, 2009 국민포장, 2021 국민훈장목련장
지난달 7일 국민훈장목련장 수상 후 가족들과 함께.

■ 김기봉 전우, 국민훈장목련장 수상
김기봉(재단법인 군산사회복지장학회 이사장, 해병 256)전우는 지난 9월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제22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 돕기 등 군산지역 복지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국민훈장목련장 수상의 영예를 받았다.
김기봉 전우는 “‘항상 남을 배려하며 살아라’고 가르쳐 주신 어머님께 이 영광을 바칩니다”고 말했다.

■ 잡초 같은 삶, 17살에 해병대 되다
김기봉 전우는 4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남의 땅을 안 밟고 다녀도 됐던 김기봉 소년의 집안은 가장인 아버지의 사망으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학업을 지탱할 수 없어 중학교 2년으로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군산·목포·여수 등 항구 도시는 거친 바다 사나이들과 밀수꾼들의 활동 무대였으니 가정이 어렵고 학교도 못 다니는 김기봉 소년에게는 움츠러드는 것보다는 주먹을 통한 반항이 훨씬 더 자신을 위로하는 삶이었으리라.
태권도와 복싱 등 날렵한 동작의 김기봉은 군산시내를 활보하는 싸움꾼 청소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7살 되던 해 기봉이는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정신이 번쩍 들자 ‘얼른 군에 다녀와 나의 길을 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즉시 해병대를 지원했으나 나이 때문에 허락이 안 되었다.
그렇다고 물러설 김기봉이 아니었다. 잡초 같은 삶을 살았기에 ‘안 되면 될 때까지’ 인내와 노력을 하는 품성이었던 김기봉은 모병관에게 자신의 사정을 이해시키며 “해병대에 꼭 가게 해 주십시오” 하자 “가서 열심히 해라. 합격!”하여 1972년 12월 해병 제256기로 진해 신병훈련소에 입소했다.

■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싸움꾼
12월, 진해 겨울 바다를 뛰어드는 인간개조 지옥훈련을 이기고 빨강명찰 해병대사나이로 태어난 김기봉 이병은 서부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당시의 해병대는 월남전에서 귀국한 눈에 핏발이 번뜩이는 선배들과 1973년 해병대사령부 해체로 인해 해병대전통을 잇기 위한 ‘빡쎈’ 군기 때문에 매일 ‘빳다’를 맞아야만 잠을 잘 수 있었다.
입대 전만 하더라도 싸움꾼들 위에 군림했던 김기봉이 매일 ‘빳다’를 맞아야 하는 졸병 신세의 해병대 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고 반항심이 들기까지 했다.
그 반항심이 ‘그래, 나는 사회에 나가서 주먹으로 살아야겠다’ 결심케 했고 제대 후 전국에서 알아주는 군산 싸움꾼으로 알려지게 됐다.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김기봉이었지만 그가 걷는 길은 깊은 암흑의 길, 삶을 포기한 자살의 길, 주먹 하나로 진출한 주먹의 길목을 걸어야 했다.
그것은 가슴속에 응어리진 배움의 중단과 배고픔과 그리고 미움보다 더 무서운 사회의 무관심이 한으로 남아있는 운명과 숙명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 “베풀며 살거라” 엄마의 교육이…
하지만 천성이 착한 김기봉은 엄마가 어렸을 적부터 “기봉아, 너는 항상 남에게 베풀며 살거라”하신 말씀이 가슴에 새겨졌기에 받는 것보다 남에게 주는 사랑의 길을 향해 위대하고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이 같은 굴곡진 삶이 오늘날 존경받는 군산사회복지재단 이사장 김기봉으로 존재케 하는 이유일 것이다.
김기봉 이사장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35년간 5천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과 격려금 이웃돕기 등 200억 원의 거금을 사회에 환원시켰다.
하림그룹 김흥국 회장은 김기봉 이사장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기봉 형님은 돈의 힘, 권력의 힘, 주먹의 힘이 아니라 인격과 인품, 인성을 앞장세운 존경받는 분입니다. 그분은 힘들 때마다 목양원(지체장애인의 집)을 찾아 ‘목양원 천사들을 만나면 힘이 난다’고 말합니다. 김 이사장님이 돈 버는 목적은 오직 장학 사업을 위해서입니다.”

■ ‘충성, 명예, 도전’ 해병대정신이 낳은 국민훈장목련장
‘돈은 X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써라’고 했듯 김기봉 회장은 돈 버는 방법과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즉 제대 후 잠시 가방 공장을 운영하다가 연예인들과 특별한 인연을 바탕으로 포항·서산에 나이트클럽을 운영, 대박의 신화를 낳았다.
1986년 팔순 노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 군산으로 귀향해서 한국관 나이트클럽을 한국 최대의 규모와 시설 투자를 해 나훈아 가황이 3일간 오프닝 행사를 지원해 대박의 신화를 창조했다.
장학회 행사 때는 방송국 행사보다 더 화려한 연예인 60여 명이 군산에 내려와 청소년과 군산시민들에게 힘을 줬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데리고 박찬호 야구감독에게 데려가 ‘할 수 있다’ 정신을 익히게 하는 등 군산시민들로부터 열광의 박수를 받았다.
이 같은 김 이사장의 장학 사업이 국가에서 인정되었고 김영삼 대통령 표창과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표창 수상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특히 지난 9월 17일 국민훈장목련장 수상은 대한민국 국민을 대표해 국가가 주는 가장 큰 가치가 있는 포상이다.
그 영광을 받은 김기봉 전우는 “오늘이 있기까지 하늘에 계신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님과 원불교 심동원 김혜봉 이사장님의 덕분입니다”며 겸양의 모습을 보였다.
오늘의 김기봉 이사장에게는 정신적 모태가 어머니의 사랑정신이다.
그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안 되면 될 때까지’ 인내와 도전정신의 삶을 개척해 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충성, 명예, 도전’ 해병대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김기봉 전우에게 힘찬 박수를 보낸다. 필승! 【특별취재 : 신동설 발행인, 사진=박흥배 보도국장】

 

 

 

 

 

국민포장(2009, 이명박 대통령), 국무총리표창(2006) 등 김기봉 이사장의 집무실에는 상패가 가득하다.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장학금 전달식

□ 해병대전우회 전북연합회 군산시지회

군산시전우회 서해 훼리호 사고 수습 관련 대통령 단체표창

김기봉 전우는 1992년 군산시해병대전우회장을 맡아 5년간 봉사했다.
특히 1993년 10월 10일 정기여객선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로 362명 승객 중 292명 사망, 70명이 부상한 대형 해상사고가 났을 때 김기봉 당시 회장은 군산시전우회원 60여 명과 함께 사고 수습과 사망자 운구 및 경비 보호를 위해 연 600여 명이 참석, 봉사해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단체표창을 수상했다.

서해 훼리호 침몰 사고 모습.

 

 

 

 

 

 

<중앙> 김기봉 이사장 <좌측부터> 기영도 전북연합회장, 문모세 군산시전우회장, 김현봉(해병 239) 제7대 군산시전우회장, 김 이사장, 남춘배(해병 264) 제4·8대 군산시전우회장, 김종면(해병 651) 전북연합회 사무처장 겸 군산시전우회 사무국장, 손명엽(부 148) 군산시사회복지장학회 상임이사.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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