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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과 인간이 모두 경탄할 공훈 -이승만 대통령-

기사승인 2021.08.31  09: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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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 용사들, 김일성·모택동고지를 점령하다(1951.8.30.~9.3.)

“단 한 개의 고지라도 더 많이 차지해야 한다!”
산악전에서도 탁월한 전투력과 용맹 발휘한 해병대
중동부전선의 주도권 강화 위한 임무 수행으로 적격

김일성고지전투 작전 상황도.

■ 전환기 맞은 6·25전쟁
6·25전쟁 발발 후 1년이 지난 1951년 6월 후반, 전쟁의 흐름은 전환기를 맞게 됐다.
개전 1년째를 맞으면서 침략의 원흉인 북한과 그 지원세력인 중국, 그리고 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UN 16개 회원국들이 점차 장기전 양상이 강해지는 전황에 우려를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공산진영은 자신들의 한반도 장악 야욕이 국군과 UN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사실상 무산되면서 더 이상의 전쟁 지속으로 얻을 실익이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UN 참전국들, 특히 미국은 이 전쟁이 한반도를 넘어 소련과의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그 결과 6월 24일 말리크 UN 소련대표의 제안을 미국이 수용하면서 7월 10일 개성에서 첫 번째 휴전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면서 일방적 피해를 입은 한국은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민 대다수가 휴전에 강력 반발했지만, 전쟁 수행 능력의 상당 부분을 미국 등 UN군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6·25전쟁 당시 양구의 펀치볼에서 대기 중인 병력들.

■ 고지 쟁탈전 양상 가속화
한편 전장에서의 전투 상황도 소강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특히 4~5월에 있었던 중국군의 잇따른 춘계공세가 국군과 UN군에 의해 분쇄되면서 공산군의 공세 역량이 한계점에 이르면서 양측 사이의 전선은 1951년 6월 15일을 기점으로 하여 임진강에서 연천, 철원, 산양리, 장평리, 서화, 간성으로 이어지는 일대에서 고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UN군과 공산군이 본격적으로 휴전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전쟁은 각자 진지를 구축한 가운데 방어 위주로 펼쳐지는 참호전, 그리고 고지 쟁탈전의 양상이 강해졌다.
휴전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라고 할 수 있는 남북한 사이의 군사분계선 설정에서 서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양측은 한 개의 고지라도 더 많이 차지하고자 물고 물리는 격전을 벌여 나간 것이다.
이와 관련, 당시 UN군은 휴전 시점에서의 전선을 기준으로 할 것을 주장했던 반면, 공산군은 기존의 38선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계속된 도솔산 일대 방어작전
이 무렵 해병 제1연대는 천신만고 끝에 확보해낸 도솔산 일대에서의 경계를 강화해 나갔으며, 정찰작전과 진지 구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6월 말부터는 북한군 제27사단 소속 제32연대의 병력이 인근 대우산에 근거지를 두고 여러 차례에 걸쳐 야간기습을 시도했지만, 해병대는 적지 않은 인명손실을 치르는 가운데 이들을 격퇴해 나갔다.
여기에 7월 8일부터는 제5·7·10중대를 투입하여 적 병력이 자리 잡은 대우산에 대한 직접 공격을 실시했는데, 유감스럽게도 7월 10일까지 계속된 이 작전은 적군의 완강한 저항과 비가 쏟아지는 불리한 기상조건으로 실패하였다.
대신 7월 11일~17일에 재개된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도솔산에서의 방어가 안정을 찾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때의 방어작전에서 해병대는 적군 총 547명을 사살하고, 17명을 생포하는 한편 67정 이상의 소총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지만, 86명의 전사자와 250명의 부상자를 비롯한 인명손실을 입었다.
이후 해병 제1연대는 홍천 북쪽의 철정리로 이동한 뒤 약 1개월에 걸친 휴식과 함께 훈련, 재편성을 통해 다음 작전을 준비해 나갔다.

■ 해병대, 중동부 전선 재출동
그리하여 다시 전선으로 출동한 것은 8월 27일이었고, 다음날 평촌에 집결한 즉시 도보로 전선을 향해 이동했다.
행군 도중에 내린 호우로 이동해 지장을 받기도 했던 제1연대는 도착 직후 미 해병 제1연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캔자스 선의 방어작전에 돌입했다.
그곳은 당시 중동부전선에서 가장 험준한 해안분지, 일명 ‘펀치볼(Punch Bowl)’ 고지 지대에 해당했다.
당시 해병대가 담당하게 된 목표는 도솔산을 기점으로 만대리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북단 능선 일대에 놓여 있는 주요 고지들이었는데, 그동안 이 지역에서는 국군 및 UN군과 공산군이 서로 소규모의 정찰작전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동안 빈 공간이나 마찬가지였던 이곳 일대를 확보할 경우 만대리 분지 전체가 국군, UN군의 통제 아래 놓이면서 금강산을 바로 정면으로 향하는 쐐기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즉, 금강산 인근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면서 중동부전선에서의 주도권 강화 여부와 직결되는 전투인 셈이었다.
본래 상륙전을 전문으로 하는 해병대의 성격상 이러한 산악전투는 그다지 어울리는 임무가 아니었지만, 이미 도솔산전투에서 그 탁월한 전투력과 용맹을 떨쳤던 점에서 볼 때는 오히려 해병대야말로 적격이었다고 할 수 있는 작전인 셈이다.

■ 김일성고지와 모택동고지
펀치볼지대에서 가장 험준했던 곳은 924, 1026고지 두 곳이었다.
여기에는 북한군의 최정예로 알려진 인민군 제3군단의 제1사단 소속 제3연대가 배치 중이었는데, 각 고지에 1개 대대 규모(약 5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후방에도 1개 대대를 예비대로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들 총 3개 대대 규모의 적군은 각 대대마다 소령제 82mm 박격포 8문과 중기관총 6문을 갖추고 있었는데, 해병대의 것보다 우세한 화력을 퍼부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여기에 진지 전방에는 수많은 지뢰까지 매설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해 나갔다.
이미 도솔산에서 해병대에게 참패를 당했던 적군은 924, 1026고지에 ‘김일성고지’와 ‘모택동고지’란 이름을 붙이면서 결사적인 방어 및 설욕 의지를 다지기까지 했다.
이들 양대 고지 가운데서 해병대는 우선 924고지, 즉 ‘김일성고지’부터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며, 제3대대가 그 중책을 맡게 되었다.
8월 30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이 제1·7연대를 각각 전방 좌우에 비치한 가운데 공격을 담당한 제3대대는 월산령에 집결하여 작전 개시를 기다렸다.
당시 제1연대는 제3대대를 예비대로 운용 중이었으며, 제1·2대대를 전방 일전에 배치하고 있었다.

■ 부상당한 연대장 김대식 대령
공격 개시일인 8월 31일 먼저 정찰소대가 차출되어 924고지 부근의 수색에 나섰는데, 도중에 적의 사격을 받으면서 제11중대가 급히 지원에 나서 적군을 격퇴했으며, 곧바로 924고지의 정면 공격을 시작했다.
동시에 제9중대도 오른쪽으로 924고지를 우회하여 공격에 나서면서 해병대원들은 계속 전진해 나갔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안개로 인하여 시야 조건이 악화되었고, 북한군의 대응사격이 거세지면서 일단 월산령으로 후퇴해야 했다.
이 와중에 연대장 김대식 대령이 적이 매설한 지뢰가 폭발하면서 부상을 입었고, 부연대장이었던 김동하 중령이 임시로 연대장의 직위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3대대는 다음날인 9월 1일 아침 7시에 924고지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였다.
이번에는 적의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판단된 동북쪽 방향의 능선을 통해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며, 제10·11중대가 각각 좌우를 맡기도 했다.
이 작전이 공격 초반에 효과를 거두면서 두 중대는 924고지의 바로 근처까지 접근해 나갔지만, 제10중대 정면에서 적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사상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김동하 중령은 제10중대를 급히 철수시키는 대신 제11중대의 지원을 수행 중이던 제1대대 소속 제1중대를 오후 2시에 투입시켰다.
국군과 UN군으로부터 상당 수준의 화력지원을 받은 제1중대는 오후 6시에 고지 전방 100m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고, 곧 50m 전방까지 접근해냈다.
924, 1026고지의 적군도 당황한 나머지 무차별적 사격을 퍼부으며 발악적인 저항을 계속했다.

펀치볼지대 최대 격전지, 나흘 동안 격전 끝에 탈환 쾌거
중동부전선 전술적 요충지 확보 ‘유리한 지형 확보 기여’
적 382명 사살·44명 생포, 소총 126정·기관총 17문 노획

김일성고지전투 당시 적진을 향해 진격하는 해병대원들.

■ 김일성고지를 손에 넣다
첫 목표인 924고지 가까이에 접근하는 데 성공한 해병대는 이제 적이 굳게 버티고 있던 참호와 진지들을 제거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여전히 우세한 적의 화력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각 중대장들은 밤 8시 화기소대가 보유한 화염방사기를 동원하여 적 참호와 진지의 공략에 나섰으며, 동시에 나머지 중대원들도 적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이로써 ‘김일성고지’는 해병 제1중대 장병들의 손에 넘어왔다.
그러나 고지를 점령한 직후 인원 점검을 해본 결과 무려 30명 이상의 대원들을 잃은 후였다.
여기에 북한군은 곧바로 2개 중대 병력을 투입해 924고지를 다시 차지하려 했다.
제1중대 대원들은 이들의 첫 기습에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분투를 벌였지만, 밤 9시 30분경 북한군 1개 중대가 추가 증원되자 일단 고지에서 50m 정도 철수하면서 제1대대 소속 제3중대의 지원으로 겨우 적의 진격을 저지했다.
결국 9월 2일 제3·9중대를 주력으로 하여 다시 924고지에 대한 공격이 펼쳐졌으며, 화력지원과 지뢰지대 돌파 그리고 백병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오후 12시 30분이 되어서야 924고지는 완전히 점령될 수 있었다.

■ 남은 건 모택동고지뿐
이제 남은 것은 1026고지, 즉 ‘모택동고지’뿐이었다.
사흘 동안에 걸친 924고지 점령 작전으로 제1·3대대는 상당한 인명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결국 이들 두 대대는 앞으로의 작전을 위한 재편성 및 병력 보충 차원에서 1026고지의 공격 임무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고, 대신 예비대 역할을 수행 중이던 제2대대가 투입되었다.
924고지의 점령 이후 적에게 방어태세 강화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허용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머뭇거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2대대는 924고지의 점령이 완료된 당일, 즉 9월 2일 오전 10시에 월산령으로 이동했는데, 당시 북한군은 924고지를 상실한 직후 1026고지에 인민군 제1사단 소속 제3연대의 제2대대를 배치한 상태였다.
이들은 약 400명의 병력을 보유 중이었고, 소련제 최신화기를 갖추었다.
제2대대가 공격에 나선 것은 오후 3시였는데, 주력부대는 제5·6중대였다.
이들은 목표인 1026고지의 길목에 위치한 무명의 고지 2개를 점령하면서 전진해 나갔다.

■ 위기를 넘어 모택동고지 점령
9월 3일 오전 4시가 되면서 적군은 약 7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제2대대에 기습을 시도했지만, 미리 경계태세에 있던 제2대대 장병들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2시간 동안 벌어진 이 야간전투에서 제2대대는 적 36명을 사살하는 등 성공적으로 적군의 기습을 막아내고, 1026고지를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오전 10시 제6·7중대는 마침내 1026고지 근처까지 나아가는 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적의 우세한 사격을 받으면서 위기에 봉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제2대대 본부는 즉시 항공기와 야포의 화력지원을 요청하면서 대원들에게는 끝까지 임무 완수를 위해 맞설 것을 명령했다.
다행히 화력지원이 도착하면서 제6·7중대는 다시 고지를 향해 돌진을 계속할 수 있었으며, 11시 30분경 고지로의 근접 접근에 성공했다.
이후 잠시 전진을 중지했던 해병대원들은 일제히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고, 치열한 격투 끝에 오후 1시 45분 드디어 1026고지까지 점령해내고야 말았다.
1026고지 점령 직후 제2대대는 적의 역습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인근의 1056고지로 공격 목표를 전환했으며, 오후 3시 50분에 1056고지의 점령을 마무리한 뒤 이들 3개 고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 해병대 이름을 널리 알리다
이로써 해병대는 도솔산전투로부터 약 2개월 만에 펀치볼지대의 최대 격전지로 평가되었던 김일성, 모택동고지를 나흘 동안의 격전 끝에 탈환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당시 중동부전선의 좌우에 각각 배치되었던 국군 제5사단과 미 해병 제1연대는 가칠봉과 502, 702고지로 연결되는 능선 일대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해병대의 김일성, 모택동고지 승리를 “신인(神人)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격찬했다.
펀치볼지대에서의 전투를 통틀어 해병대는 적군 382명을 사살하고, 44명을 생포했으며, 소총 126정 및 기관총 17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신 105명의 전우를 잃고 388명이나 되는 장병들도 부상을 입는 인명손실을 겪어야 했다.
이렇게 하여 목표를 점령한 우리 해병대는 924고지, 1026고지 및 1056고지 등 일대에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하였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우리 해병대의 이름이 또다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정리 : 박흥배 보도국장 / 발췌 : 대한민국 해병대(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족보) 김재엽 저】

해병대도솔산·펀치볼지구전투전적비
해병대 김일성고지작전 전몰영령 진혼제 기념비(1998. 해병 8기 동기회 건립)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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