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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역사를 알아야 더욱 강한 해병대가 될 수 있다”

기사승인 2021.08.02  14:0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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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년 전 8월 1일 입대한 해병 3기, 김병철(해병 3기) 노병, 그날을 말하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8월, 71년 전 북한의 남침이 있던 해인 1950년, 생후 1년밖에 안 된 대한민국 해병대가 ‘어떤 모습으로 용트림을 시작했는가?’를 부산에 거주하고 있는 해병 3기 김병철 노병을 통해 입대부터 전쟁 참전, 그리고 총상을 입고 불구의 몸으로 오직 해병대정신 하나만 붙잡고 살아온 그의 일생을 조망해보며 당시의 역사를 밟아본다.

6·25전쟁 시 제주북초등학교의 해병대 입대 모습

■ “적을 한 명이라도 없애야겠다” 해병대 결심

▲ 김병철 회장

해병 제3기, 화랑무공훈장
6·25참전 전상이국가유공자

무공수훈자회 부산중구지회 고문

해병대전우회중앙회 前 부총재

부산 해병3·4기전우회 회장

부산 중구 광남새마을금고 명예이사장

김병철은 1929년 6월 제주도 제주읍 오등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누님 한 분과 함께 살았다.
김병철의 나이 18세 때인 1948년 4‧3사건으로 동네 지도자인 숙부와 할머니 숙모 그리고 8개월 된 딸까지 처참하게 공비들에게 희생당했고, 김병철의 초가집도 불을 질러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었다.
4·3사건이 진압될 무렵인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만약 나라가 적의 수중에 든다면 우리는 다 죽게 된다는 것을 무장공비들의 만행을 통해 알게 된 김병철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적을 한 명이라도 없애야겠다”는 우국충정의 피가 끓고 있던 차에 해병대 모집을 알리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가자, 해병대로~!” 결심하곤 즉시 실천에 옮겼다.
1950년 7월 21일 21세의 우람한 체격의 청년 김병철은 제주 북초교에서 신체검사 ‘갑종 합격’, 8월 1일 09시 북초교 교정으로 집합통보를 받았다.
이렇게 그는 대한민국 해병 제3기로 선택되었다.

■ “어머니 군대에 감쑤다” 해병 3기 되다
집에 돌아온 그는 “어머니, 8월 1일 군대에 감쑤다”고 갑자기 어머니께 말을 꺼내자 33세에 남편과 이별하고 아들만 믿고 살아온 어머니는 우시면서 “전쟁에서 잘못되면 대가 끊어진다”고 하셨다.
이미 결혼을 해 함께 살던 아내 역시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걱정맙서. 저는 꼭 살앙 돌아오쿠다”고 안심시키려 말했을 뿐 이미 김병철의 길은 정해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광목천을 들고 온 동네를 돌며 천인침(배에 두르면 총알이 비켜 간다는 일본군의 풍습)을 만들기 시작, 아들과 이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0년 8월 1일 날이 밝자 어머니가 만들어준 천인침을 배에 두르고 태극기를 어깨에 대각선으로 걸고 동네 친구 김석종, 이찬협과 함께 읍내 집합장소로 걸어갔다.
북초교 교정에는 200여 명의 입영병과 환송하는 가족들로 찼다.
09시 해병대사령부 장교의 지휘로 승차하자 가족들의 “꼭 살앙 돌아오라” 외침을 뒤로 한 채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소재 해병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에 도착, 김병철은 9중대(중대장 황영 중위) 제4화기소대(소대장 허홍 소위) 바주카포사수로 편성되었다. ※ 당시 바주카포 등 이 전무한 해병대이지만 가입대 시 이미 제대 편성이 준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해병 서열 954번째 군번을 받다
8월 5일 10시 김병철 일동은 해병 제3기 입대선서와 함께 입대식을 거행했다.
김병철은 군번 9200954, 즉 대한민국 해병 954번째이니 71년이 지난 현재 100만 해병대 중 1,000명 이내의 해병대 뿌리임을 알 수 있다.
그때부터 인간개조 지옥훈련의 해병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입대 즉시 모슬봉을 선착순 오르내리며 후미는 어김없이 쪼그려뛰기, 기합 등 피나는 훈련을 강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저녁 10시 순검이 끝나면 분대장 집합으로 야구방망이로 ‘빳다’ 20대를 맞아야 잠을 잘 수 있는 담금질이 계속됐다.
“처음 20대를 맞을 때는 못 견디게 아팠지만 며칠 지나니까. 아무리 맞아도 아프지 않아요” 하며 노병은 그날을 말한다.
하루하루 죽지 않을 만큼 견뎌온 26일째인 8월 31일 하루종일 야영훈련을 마치고 다음날(9월 1일) 새벽 기상과 동시에 트럭으로 상모리 대대본부로 돌아와 총기(99식)를 반납하고 모슬포항으로 구보해 갔다.
전선으로 출동한다는 말이 현실로 와 있는 중이다. 부두에는 발동선 몇 척이 대기하고 있고 소대별로 승선했다.
그 날짜로 김병철은 이등수병(일병)으로 승진했다.

■ “여보 건강히 다녀오세요”
“통통통” 발동선이 물살을 가르며 제주항에 접안하자 수 많은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환송을 나왔다.
어머니와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잘 다녀오너라”, “여보 건강히 다녀오세요“ 인사를 나누고 LST(홍천호)에 몸을 실었다.
9월 1일 11시 해병대사령부 요원들과 해병 3기 1,661명, 해병 4기 1,277명, 해병여군 126명을 태운 3척의 수송선은 제주항을 출항하여 9월 2일 진해에 입항, 경화동 해군기지에 대기했다가 9월 6일 다시 LST를 타고 부산 제1부두에 도착했다.
9월 10일 김병철 이등수병과 부사수 1명, 탄약수 2명은 3.5인치 바주카포 1문을 수령, 타 중대 바주카포 분대원들과 함께 산에 올라 실제 사격 7발을 하는 훈련을 했다.
그날 저녁에는 미군과 꼭 같은 피복과 장비를 지급 받았다.
이로써 적의 탱크 철판 두께 45mm를 관통하는 위력의 화력과 세계 최고의 미 해병대와 꼭 같은 보급품으로 무장된 현대식 군대가 한반도 5천 년 역사 최초로 대한민국 해병대에서 시작된 날이었다.
9월 12일 한국 해병대는 제7부두로 옮겨 공격인원수송함 피카웨이(APA Pikaway)에 승선 이미 승선해있는 미 해병 5연대와 합세, 13일 오후 마라도 남쪽해상에 이르러 여기서 일본 요코스카에서 출항한 미 육군 7사단, 고베에서 출항한 미 해병대 그리고 호위함정, 함포사격지원함, 맥아더사령관 지휘함 등이 집결, 大기동함대 편성이 완료되자 미 제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 인솔하에 인천항을 향하여 힘차게 현해탄 물살을 갈라 나갔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승선하는 해병대원들

■ 인천상륙작전, 바주카포로 적군 전차 박살내다
9월 15일 여명, 상륙군을 실은 수송선단은 구축함의 엄호를 받으며 인천 외항에 접어들었다.
오전 06시 손원일(소장) 해군참모총장과 신현준(대령) 해병대사령관이 선내 방송으로 “곧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다. 해병대 장병이여! 용감히 싸우라”는 취지의 방송이 있었다.
미 해병 5연대에 이어 한국 해병 3대대가 첫 상륙을 개시했다.
김병철 해병 역시 갑판으로 집결하여 함포 사격과 폭격으로 화염에 쌓여있는 인천을 향해 하선망을 타고 내려 상륙주정에 오르자 만석동 해안으로 거침없는 질주,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김병철 해병 소속 3대대는 가랑비를 맞으며 경인선 응봉산에 야영, 16일 아침 시가지 중심부를 수색 전개해나갔다.
김병철 제4소대는 적 8명의 은닉처를 수색 소탕했다.
그날 18시 인천시 도화동 숙영 후 9월 17일 새벽에 출발, 경인가도를 따라 진격해갔다.
부평역 서북고지에서 저항하던 북한군 1개 대대와 전차 6대를 미 해병 5연대 2대대가 발견, 김 수병은 사격훈련에서 배운 대로 바주카포를 발사 명중, 적 전차를 파괴시키고 적군을 영등포 방면으로 밀어붙였다.
 
■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다
9월 20일 김포읍 신리 전방 157고지에 도착, 사주경계 도중 적 107연대가 은신해있다는 정보를 입수, 3소대가 보유한 박격포 6문을 병렬 발사하여 적을 강타하면서 김병철 해병 소속인 황영 중위가 이끄는 제9중대가 총격을 가하며 돌진, 피아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김병철 해병은 정신없이 사격 중 갑자기 우측다리 무릎 위가 ‘찌르륵~’하는 감이 왔다.
즉시 손으로 만져보니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상이다” 소리치니 위생병이 달려오던 중에 총상을 입고 대대본부로 실려갔다.
김 해병 혼자만 외톨이가 되었는데 적들이 들이닥치면 생포 또는 사살당하기 직전이었다.
아직 실탄 5발이 탄창에 남아 있었다. 초조하게 구원군이 오길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누군가 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적군임에 틀림없다는 판단으로 정조준 한 발 사격했는데 조용해졌다. 명중된 것이다.
이렇게 네 시간을 홀로 버티던 중 철모를 쓴 군인 모습이 나타나 아군임을 알고 “사람 살려라” 소리치니 “암호”하여 댔더니 달려와 구출하여 대대본부에 도착했다.
중상을 입은 김 해병을 김포비행장으로 즉시 수송하여 미군기에 탑승, 일본 후쿠오카에 착륙 대기하고 있던 앰뷸런스에 실려 미군 병원으로 이송, 일 년간의 치료를 받고 다시 진해 해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 후 1951년 9월 21일 일등수병(상병)으로 명예 제대했다.
전투 중 무공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전쟁 초기에 전공을 올리고 부상당하였지만 다행히도 미군의 선진 의료 혜택으로 일 년간 치료받았으나 부상당한 다리가 2센티미터 짧아졌고 대퇴부 뼛속에 박힌 실탄은 71년간 아직도 남아 있다.

■ 해병대정신으로 지도자의 길을 달려왔다

부산 해병3·4기동기회 김병철(左) 종신회장과 김태현(해병 4) 종신총무

김병철 노병은 전쟁의 상처를 딛고 부산에 정착하여 사업을 일구고 당시 피난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그들을 보살피며 약자를 도우는 등 부산 지역의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부산 국제시장 노점조합 조합장을 맡아 영세 상인을 규합, 범일동 인근의 상권이 형성되어 발전케 했다.
1976년 전국버스회사의 지입제 제도를 없애고 기업화하려는 정부시책에 호응 동남여객주식회사를 설립 운수업 발전에 기여했다.
1985년 광복동새마을금고 이사장직을 맡아 120배의 성장을 이뤘고 현재 명예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중이다.
그 외에도 김병철 회장의 업적은 많이 있지만 그중 제일 애착이 가는 일은 부산 해병3·4기동기회를 결성, 종신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이다.
김 회장은 금년 92세이지만 아직 그의 눈동자는 해병대정신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힘든 해병대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더욱 해병대에 애착이 갑니다. 후배님들이 해병대 역사를 잘 알아야 더욱 강한 해병대가 될 것입니다”고 힘주어 말하는 김병철 회장의 당부에 머리가 숙여진다. 【특별취재 : 신동설 발행인】

▲ 부산 지역 해병 3·4기 생존자 명단
김병철(3기), 이경선(3기), 고영준(4기), 김태현(4기), 윤기택(4기)

해병대사령부 방문한 해병3·4기생들.
6·25전쟁 참전 공로로 수훈한 화랑무공훈장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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