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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상황도로 보는- 6·25전쟁 해병대 주요 작전

기사승인 2021.06.15  11:3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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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위기의 순간에 놓였던 71년 전, 대한민국 해병대는 조국 수호와 국토 방위를 위해 분연히 일어나 수많은 전투에 참여, 피와 땀으로 이 땅을 지켜냈다. 선배 해병들이 전쟁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어떻게 대한민국을 지켜냈는지 주요 전투상황도와 함게 되돌아본다. 【고명석 기자】
 

■ 통영상륙작전(1950.8.17~9.22)

통영상륙작전 상황도(상륙군 돌격 前)

▲ 작전 배경
1950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해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진해·부산 등지로 직접 침입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고 했다.

▲ 참가 부대
아군 : 해병대 김성은부대(2·3·7중대 500명), 해군 함정 6척(PC-703·901·512·302·301·평택호)
적군 : 북한군 7사단 예하 1개 대대

▲ 작전 경과
8월 17일 새벽 북한군이 통영시내로 침입하자 해군참모총장은 해병대 김성은부대에게 거제도 상륙 후 적 격멸 명령을 하달했다. 김성은부대는 주변 적정 판단 후 해군 함정의 지원 엄호 속에 통영반도 동북방의 장평리에 상륙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작전을 감행, 18일 새벽 원문고개로 진격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통영전투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매일봉을 점령한 후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잔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 작전 의의
해병대의 최초 단독 상륙작전으로 ‘귀신 잡는 해병(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의 전통을 수립했다. UN군 철수 작전 중 방어를 위한 유일한 공격 작전이었다. 전략적 군 요충지 마산·, 진해에 대한 북한군의 해상 봉쇄 기도를 좌절시켰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 공용화기 38정, 개인화기 268정 노획
피해 : 전사 15명, 부상 47명
상훈 : 국방부장관 부대표창

 

■ 인천상륙작전(1950.9.15.)

인천상륙작전 상륙부대와 해안 상황도

▲ 작전 배경
6·25 전쟁 개전 이후 낙동강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됐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의 남진을 낙동강에서 저지하는 동시에 절대 우위의 제공·제해권을 이용해 북한 배후의 요충지인 인천 상륙을 통해 북한군을 협공할 것을 구상했다. 이 방안은 여러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미 합참은 1950년 9월 9일 최종 승인했다.

▲ 참가 부대
미군 10군단·해병대 1사단·육군 7사단, 국군 해병대 1연대·육군 17연대, 영국군, 캐나다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네덜란드군 (총 75,000명)

▲ 작전 경과
인천으로 출발한 261척의 대규모 수송선단은 9월 15일 새벽 작전을 개시했다. 1단계 작전으로 함재기가 월미도 폭격 개시한 후 순양함 포격을 실시하고, 미 해병대가 녹색해안(월미도)에 상륙했다. 제2단계 작전 미 해병대가 청색해안과 적색해안에 상륙 개시하고, 뒤이어 대한민국 해병대도 상륙하며 인천 해두보를 확보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인천시가지 소탕작전에 참가했으며, 이후 한강을 도하해 경인지구로 진격해 서울탈환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 작전 의의
상륙작전 시 기습 효과 달성의 중요성이 입증됐다. 또한 상륙작전에 대비한 해군·해병대의 전문화 유지 필요성과 새로운 상륙전 교리 및 기술·장비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따른 전술정보의 확보 필요성과 신형 상륙함정의 필요성 역시 부각됐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1,350명
피해 : 전사 222명
적의 주 병참선 및 퇴로 차단으로 전쟁의 주도권이 UN군으로 급전됐다.

 

■ 도솔산지구작전(1951.6.4.~20.)

도솔산지구작전 제1기 전투 상황도

▲ 작전 배경
도솔산지구는 38선 이북의 강원도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 지역으로, 좌우에 북상하는 도로를 끼고 있어 만약 이 지역을 확보하지 못하면 좌우편에서 북상 중인 국군의 전선부대가 한 걸음도 진격하지 못하게 되는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제 북한군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 참가 부대
아군 : 해병대 1연대(연대장 김대식 대령)
적군 : 북한군 12사단

▲ 작전 경과
원래 미 해병대 1사단의 5연대가 맡았으나 많은 손실만 입고 탈환하지 못하자, 1951년 6월 3일 해병대 1연대가 공격 임무를 인수했다. 북한군은 약 4,200명의 병력으로 무수히 많은 지뢰를 매설하고 수류탄과 자동화기를 퍼부으며 완강히 저항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병대는 치열한 육박전과 강력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 적과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불가능에 가까웠던 24개 목표 고지 완전 점령에 성공하는 대역사를 썼다.

▲ 작전 의의
무적해병(無敵海兵)의 찬란한 전통을 수립했다. 적의 전략적 요충지인 만대리 해안분지를 남쪽에서 통제 가능하게 하며, 양구-인제 양 측방 주보급로 확보로 아군 전선의 활로를 개척했다. 특히 미 해병대가 실패한 난공의 고지를 탈환해 대한민국 해병대의 용맹성을 과시했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3,000여 명, 포로 44명, 귀순 7명, 공용화기 75정
피해 : 전사 123명, 부상 400여 명
상훈 : 미국 은성·동성무공훈장(대령 김성은, 대령 김대식 등), 대통령 표창 및 훈·표창장, 한국 국회 감사문

 

■ 김일성·모택동고지작전(1951.8.30.~9.3.)

김일성·모택동고지작전 고지전투 상황도

▲ 작전 배경
1951년 7월 10일 개에서 휴전회담이 개최되며 소규모 정찰전이 실시되고 있던 시기였다. 김일성·모택동고지는 펀치볼의 일부 중동부 전선의 요지로, 북한군 3군단 1사단 3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김일성(924)고지와 모택동(1026)고지의 이름은 적개심 고취로 목표를 반드시 탈취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높이기 위해 명명한 것이다.

▲ 참가 부대
아군 : 해병대 1연대(연대장 김동하 중령)
적군 : 북한군 제1사단 3연대

▲ 작전 경과
북한군은 화기진지를 종심 깊게 배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해병대는 8월 31일 날이 밝자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로 공격이 정체되고 사상자가 속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병대는 굽히지 않는 투지와 용기로 혈전을 거듭한 끝에 9월 2일 김일성고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9월 3일에는 끝까지 저항하는 북한군에게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일제히 돌진, 백병전 끝에 모택동고지도 완전히 점령했다.

▲ 작전 의의
펀치볼을 장악함으로써 중동부전선의 전술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적의 본거지인 내금강산의 유리한 지형 확보에 기여했으며, 휴전회담 재개로 휴전선의 유리한 지형 확보에도 기여했다.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전통을 수립하며 국내·외 크게 과시했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신인(神人)이 경탄할 공훈”이라고 격찬했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701명, 포로 244명, 공용화기 71정, 개인화기 324정
피해 : 전사 183명, 부상 717명

 

■ 양도작전(1952.2.20.~21.)

양도작전 상황도

▲ 작전 배경
대한민국 해병대는 동해안의 요충지 원산항을 제압하기 위해 여도를 위시한 각 도서에 이미 상륙했고, 서해안 주요 도서를 점령해 제해권을 완전히 제압하고 있었다. 독립41·42중대가 동서해 도서로 발진하게 되자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신편된 부대가 독립43중대였다. 독립43중대는 해안 봉쇄선을 연장하고자 하는 해군의 요청과 적의 후방을 위협하는 동시에 첩보 공작을 실시해 차기 작전에 대비하고자 1951년 8월 28일 양도를 무혈 점령했다.

▲ 참가 부대
아군 : 독립43중대(중대장 최청송 중위)
적군 : 북한군 총사령부 직속 독립63보병연대 특별대대

▲ 작전 경과
1952년 2월 20일 북한군은 목선(어선) 52척, 발동선 2척으로 길주양도, 명천양도에 기습 상륙을 시도했다. 독립43중대 1소대(명천양도)는 적 발동선 2척을 격침했다. 적 주력은 길주양도 70고지 및 명천양도 47고지를 점령했다. 해병대는 고지를 둘러싼 섬 주변 호 속에 포진해 진지를 사수했다. 적이 명천양도 출신 첩보원 안내로 해병대 진지를 공격하자, 해병대는 집중 응사로 적을 고지에 집결시켰다. 적이 소기 목적을 포기하고 범선으로 도주 시작하자, 해병대는 집중사격으로 적 선박을 격침하며 적을 섬멸하고, 육박전 끝에 길주양도 70고지도 탈환했다.

▲ 작전 의의
양도작전은 중대장(소대장)의 탁월한 독단 지휘 능력으로 적 대대 상륙을 유인, 기습 공격으로 격멸한 뜻 깊은 작전이었다. 이 작전으로 동해상 전략 도서를 확보, 해안 봉쇄선 연장 및 적의 후방을 위협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독립43중대는 이후 부대개편 계획에 따라 양도부대로 개칭됐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83명, 익사 73명, 포로 14명, 15척 선박 격침
피해 : 전사 8명, 실종 2명
상훈 : 미국 은성·동성무공훈장(각 1명), 을지·충무·화랑무공훈장(41명)

 

■ 장단(사천강)지구작전(1952.3.18.~1953.7.27.)

장단지구작전 최초 전투(1952.4.) 상황도

▲ 작전 배경
1952년 초 수도서울 방위에 역점을 둔 미8군의 전선 부대 재배치가 이뤄졌다. 3월 17일 해병대 1연대는 미 해병 1사단과 함께 중동부전선에서 장단지구로 이동, 김포지구의 독립5대대와 연계해 수도권 방어 임무에 돌입했다. 이는 휴전 회담장(판문점) 중심 반경 1km 이내 지역으로 서측 방호의 중요성 부각됐다.

▲ 참가 부대
아군 : 해병대 1연대(이후 해병대 1전투단으로 증편)
적군 : 중공군 65군 예하 194·195사단

▲ 작전 경과
1차 전투(1952.4.1.~6.29.) : 연대장 김동하 대령을 필두로 중공군의 2차에 걸친 기습공격과 3회의 야간공격을 막아냈다.
2차 전투(1952.9.6.~19.) : 김석범 대령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는 기치 아래 적 대대 규모의 공격을 역습으로 격퇴, 중공군 공격 기세를 꺾었다.
3차 전투(1952.10.2.~10.7.) : 수도권 방어 임무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1전투단으로 보강, 김석범 준장의 지휘 아래 중공군 공격을 유인 역습 작전으로 격퇴했다.
4차 전투(1952.10.31.~11.1.) : 김성은 대령이 중공군의 대규모 2차 공세를 저지하여 적의 전투 의지 상실 및 반격 작전으로 최대의 전과를 획득했다.

▲ 작전 의의
해병대 전투 중 가장 장기간의 전투로, 불리한 지형적 조건에서 16개월간 장기간의 방어 임무를 완수하고, 전초기지 작전을 수행했다. 개성·문산 축선을 지켜 수도권 방어에 기여했으며, 휴전 시까지 임무 수행에 성공함으로 차후 해병대 확대 개편의 계기가 됐다. 특히 군사분계선을 아군에 유리하게 확정 짓는데 기여했다.

▲ 작전 결과
전과 : 적 사살 14,017명, 포로 11,011명, 포로 42명
피해 : 전사 776명, 부상 3,214명
상훈 : 대통령 부대표창, 국회의장(민의원) 감사장

 

고명석 기자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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