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5인의 해병’ 그날, 2인의 해병이 더 있었다

기사승인 2019.04.16  13:28:12

공유
default_news_ad2

- 이웅열(해병 163기, 군번 9319883) 노병

 ■ ‘5인의 해병’ 유래
1961년, 한국 전쟁영화의 시초 작품인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5인의 해병’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리고 해병대의 특수전을 알리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 영화가 나온 지 4년 후인 1965년 포항에서 해병대의 꽃이라 불리는 해병대 수색대원 다섯 명이 훈련작전 중 전사했다.
경북 포항시 성라면 방석리 해안 마을에 ‘5인의 해병탑’이 세워져 있고 해병대 역사에 기록되어있다.

■ ‘5인의 해병’ 외 생존한 2인의 해병
1965년 12월 13일 ‘해룡작전’이라 명명된 상륙훈련이 개시됐다.
포항 해병대 1사단 1연대상륙단 수색중대 중위 강대현 수색소대장이 인솔하는 유중광(150자)상병, 오경환(150자) 일병, 한창환(해병 162) 일병, 이웅열(해병 163) 일병, 유문선(해병 164) 일병, 김규산(해병 164) 일병 등은 미 7함대 소속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양쪽에 3명, 가운데 1명이 타야만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7인승 고무보트에 올랐다.
그 시간은 12월 새벽 겨울바다에서의 칠흑 같은 어두움과 억수 같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한치 앞이 안 보이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모선이 상륙할 지점을 수색 정찰하고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은 바다에서 노는 것이 육지보다 더 익숙한 전투수영으로 단련된 수색대원에게는 그 어떤 악조건이라도 두려울 것 없는 하찮은 명령일 뿐이다.
7인의 해병이 상륙 지점을 향해 전진하려는 그때 하늘과 바다가 합작한 바닷물과 광풍이 미친 듯 동반하면서 바다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아닌가?
“소대장님! 유 수병님!” 선임을 불렀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 엄격한 생존훈련 교범대로 행했더니 살았다
이 작전에서 5인의 해병은 희생됐고, 그들은 ‘5인의 해병’이라는 이름으로 해병대 역사에 영원히 남아있다.
그날 두 명의 생존자 중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이웅열 노병은 수색대의 훈련 교범대로 침착하게 대처하여 살아난 그날의 악몽을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날의 생존자들은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않은 채 희생자들만 역사에 남아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 그날의 생존자를 포함하여 적어도 7인의 해병이라는 명칭은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5인의 추모비에 그날의 생존자 명칭도 덧붙여 훈련 교범대로 살아온 그를 ‘자랑스러운 해병대’로 기록하여야 한다.   【취재 : 신동설 발행인 / 사진 : 박흥배 보도국장】

이웅열(해병 163기, 군번 9319883) 노병


| 일문일답 |

■ 악몽 같은 55년 전, 그날을 말하다


7인의 해병 증 유일한 생존자인 이웅열 당시 일병은 그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55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은 상상하기도 싫은 정말 무서운 바다였습니다. 그때 나는 물속에 머리를 쳐 박고 몇 번인가를 내밀기를 반복하며 전우를 찾으려 주위를 둘러봤으나 아무도 안보이더군요.”
-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날 수 있었습니까?

망망대해에서 미아가 된 나는 ‘이것도 훈련이다’ 생각하며 침착하게 배운 대로 해가기로 했습니다.
‘저기 육지가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그곳을 향해 전투수영을 하기 시작했죠.
한번은 파도에 올려놓고 한번은 물속에 머리를 쳐 박아 놓고 헤엄치다가 숨이 차면 산 같은 파도에 몸을 맡기고 조금씩 전진해 갔습니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 때 저 멀리 육지가 보이더군요. ‘이제는 살았구나’ 하며 마지막 힘을 냈습니다.

- 그래도 위험한 고비는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육지에 가까워지면서 하얀 파도가 하늘로 뻗치는 곳을 피했습니다.
그곳은 암초가 있는 곳이어서 죽으니까 아무리 가까워도 가지 말자 생각하고 멀리 돌아서 파도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갔습니다.

- 제일 위험한 고비는 무엇이었습니까?

온몸이 얼어서 수영하기가 힘들어지고 자꾸 눈이 감겨서 잠을 쫒느라 있는 힘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파도에 밀려 모래 바닥에 닿을 때였어요. 만약 파도에 끌려 다시 바다로 내몰린다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저희 수색대원들은 이런 상황에 처한 훈련을 엄청 많이 했기 때문에 무의식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렇군요. 평소 훈련이 나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 실감납니다. 다시 한 번 그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수색대 훈련은 생각하기 싫을 정도로 무척 맞아가며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무의식 속에서도 그 훈련이 생각나는 거예요.
‘저기 백사장 끝에 닿을 때 힘을 줘서 나 자신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준비하고 힘을 축적하면서 파도에 나를 맡겼어요.
그리고 ‘이때다!’ 하고 그냥 힘을 줘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정말 기적같이 살아 왔습니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온몸이 저려오고 그 트라우마에 갇혀 평생을 살아오고 있는 중입니다.

- 그렇게 물속에서 사투했던 시간은 몇 시간이었나요?

전혀 기억이 안 납니다. 실신되어 모래바닥에 있었는데 누가 내 입술을 만지는 것 같아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어요.
동네사람이었어요. “누구냐” 묻기에 “군인이다” 했지만 믿질 않는 거예요.
그 엄청난 파도에서 사람이 나왔으니 간첩이 표류한 걸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조금 있으니까 순경이 왔고, 그러지 않아도 군인들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군요.

- 살아왔을 때 5명이 희생된 것을 알고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나머지 대원들도 다 살아온 줄 알았어요. 나 같이 파도에 밀려 어딘가에 있을 줄 알고 해안가를 다 찾아다녔습니다.
한창환 대원만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제대 후 다시 해병대 수색대에 재입대하였다가 그날의 후유증으로 군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일찍 생을 달리했습니다.
30년 전에 포항 수색대에 근무할 때 찾아갔었는데 정신적으로 힘들어 하면서 술을 많이 마신다고 말하더군요.


- 그 작전에 대한 국가포상은 없었습니까?

나중에 사단장 표창장을 받았습니다. 표창장을 분실해서 나중에 사본이라도 달라고 사령부에 말했더니 화재로 기록이 없어져서 못해준다고 하더군요. 그것이 모두입니다.

- 해병대에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선 후배님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얼마나 혹독하게 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려 있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기왕 해병대가 됐으니 해병대답게 살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 중풍으로 장애인이 되어 살고 있는 중이지만 해병대정신으로 견디고 있습니다.
해병대 훈련이 나를 살렸는데 ‘이까짓 중풍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살 수 있는 걸 알았습니다.지금은 장애인 단체 일을 보면서 함께 사랑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5인의 해병’ 역사에 그 당시 졸병인 나도 포함시켜주길 바랍니다.

▲ 이웅열
해병 163기(1965.2.5.~1967.10)
해병대스쿠버다이버 1기
포항수색중대, 청룡부대 수색특공대
강북구장애인단체총연합회 지회장
장애인단체총연합회 이사
우이동 장애인 분회장
삼각산 장애인 쉼터장
삼각산주말농장관리소장

 

 

 

 

 

 

이웅열 노병이 받은 각종 표창장 및 증서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