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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시장 인생처럼 살아온 전우

기사승인 2016.07.26  1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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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식(해병 177기) 노병을 찾아서

■  7살 어린나이에 엄마 잃고 천애고아로 시작
박순식 전우(병 177)는 현재 경기 가평군 청평면 산속의 그림 같은 자연환경에서 노부부가 편안한 여생을 살고 있다.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는 그냥 된 게 아니다.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기 전인 1954년 그의 나이 7살에 일찍 홀로된 젊은 엄마마저 어린 아들을 남겨놓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천애고아가 됐다.
엄마가 없다는 슬픔조차도 모르는 꼬마 순식이는 삼촌댁으로 가서 입에 풀칠을 하던 중 삼촌마저 세상을 떴다.
오직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삼촌 한 분이었는데 이제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따뜻한 밥 한 끼조차 얻어먹을 곳이 없게 되었다.
어리고 나약한 순식이는 길거리로 나뒹굴어져서 바람 부는 대로 또는 지나가던 사람의 발길에 치이는 대로 이리저리 굴러야만 했다.
솜사탕 장사와 아이스케키 장사 등 닥치는 대로 길거리에서 큰소리로 질러가며 호구를 연명해야 했다.
그러나 “절대로 비뚤어져서는 안 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아주 어릴 적 가정교육이 몸에 배인 순식이는 배움의 끈을 잡고 중학교라도 나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패스하여 중학 졸업 자격을 취득했다.
너무 살기가 힘들어 자살하려고 약을 먹었는데 3일 만에 깨어났을 때다.
“이제 남은 길은 죽을 만큼 열심히 사는 길밖에 없다”는 결심이 서면서.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하는 삶으로 인생 대역전극을 시작했다.
월남전이 한참일 때 기왕이면 월남 가서 싸우다 죽는 게 보람 있겠다 하여 해병대를 지원했다.
해병 177기로 1966년 5월 입대하여 얼마 있다가 월남에 지원했다.
하지만 “너 월남 가서 죽으면 대가 끊겨서 안 된다”고 독자인 자신을 보내주지 않아서 월남을 못 갔다.
도무지 죽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인가보다.

박순식 노병

■ 죽을 만큼 열심히 살자, 인생역전 드라마
1968년 만기 제대하여 청계천 공구상 바닥에 뛰어들었다.
청계천 상가에서 제일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 박순식, 일요일에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사람이 박순식으로 통했다.
그렇게 18년이 흐른 후 독립을 했다 지금의 아내 이화자 여사와 만나 결혼을 하고 단칸방에 세 살면서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나머지를 모두 저축을 시작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재산이 불기 시작하여 지금은 상당한 재력을 쌓았다.
그리고 현재는 대한체육회 가평게이트볼협회장을 맡아 건강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가 살아온 길은 죽을 만큼 열심히 일한 결과였다.
지금은 2남 1녀의 장성한 자식을 두고 큰 손자(재영)가 미국 보스턴대학 다니다 들어와서 할아버지 따라 해병대가 되겠다고 ‘해병대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장남 박기정은 해군을 제대하여 가업을 이어가고 있고, 차남 박기남은 해병 801기로 나와 잘 풀려있다.
박순식 전우가 살아온 세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국제시장 인생들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역사이고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교육적 가치다.
거기에 해병대정신이 더했기에 손자도 해병대를 가겠다고 하나 보다.
‘미국에서 세계 명문대(보스턴대학)를 다니던 손자가 할아버지가 존경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해병대를 자청했을까?’는 생각에 필자는 해병대인 것에 어깨가 으쓱해지며 해병대가 영원하길 모두가 바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해병대 만세!

신동설 발행인 sds1557@hanmail.net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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