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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하늘 아래 추념하는 ‘불멸의 忠魂’

기사승인 2022.06.20  11: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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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병대사관 35기 동기회(회장 장수근)

현충일을 맞아 송재신 중대장, 청룡 27중대와 함께 합동 현충원 참배 행사를 실시한 해병대사관 35기 동기회.

월남전참전 해병대사관 35기·청룡 27중대 합동 현충원 참배
중대장 송재신 대위 연결고리로 맺어진 깊고 진한 인연 55년
전남 하태도서도 참석… 전몰 김학태 상병 가족 “고맙습니다”

■ 왕년의 중대장이 왕년의 소대장에게 절을 올리다
지난 6월 5일 정오. 월남전참전 해병대사관 35기 24명과 파월 청룡 5대대 27중대 참전 노병 5명 등 29명이 현충일 하루 전 합동추모행사에 참석키 위해 국립서울현충원에 모였다.
35기와 27중대 ‘연결고리’는 송재신 중대장(해사 14기).
그는 1966년 해병학교 중대장으로 해병대사관후보생 35기를 교육·훈련시켰고, 이듬해 청룡 5대대 27중대장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청룡 27중대는 1·2·3소대장, 포병 FO까지 전원 35기, 송재신 중대장 제자들로 꾸려졌었다.
어디 그뿐인가. 35기는 미국 거주 그를 대신해 매년 27중대 전몰 해병 묘소를 참배해오고 있다. 깊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게 35기와 청룡 27중대 사이다.
12시 20분께 51묘역에서 때맞춰 방한한 송재신 중대장과 도킹한 29명의 노병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충성”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올렸고, 송재신 중대장은 노병들과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일행은 먼저 이수장 중위(122호) 묘소 앞에 정렬했다.
고인은 1년간의 복무가 끝날 무렵 참전했던 ‘용진작전’(1968.3.16.)에서 목숨을 잃었다.
“일동 차렷, 경례”, “묵념”, 그리고 ‘불멸의 충혼, 추모’ 글자가 선명한 리본을 비석에 부착했다.
송재신 중대장은 본인이 여단본부 작전참모실로 자리를 옮긴 뒤 전사한 1소대장 묘에 재배했다.
왕년의 중대장이 왕년의 소대장에게 절을 올리는 순간 35기 몇몇은 눈시울을 붉혔다.

전몰 전우 묘소에 절하는 송재신 중대장.

■ 월남 민병대가 화근이 될 줄은…
이어 참배자들은 해병학교 2구대장 김갑수 대위(해사 17기, 36호) 묘소로 이동, 같은 예를 갖췄다.
고인은 2대대 7중대 60mm 포반장으로 ‘용안작전’(1966.11.9.)에 참가했다 베트콩이 매설한 지뢰 폭발로 전사했다.
세 번째로 노병들이 찾은 곳은 26묘역 27중대 전몰 9명 묘소. 그들의 희생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증파 5대대(대대장 이화출 중령, 작고)는 추라이 도착(1967.7.14.) 직후 여단 예비대대가 됐다.
당시 편제 3개 보병대대만 보유, 병력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여단 G3는 5대대의 모든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운명의 8월 30일’. 그날 오후 27중대본부 대원들로 편성된 매복조 13명(분대장 서정수 하사, 전사 후 중사 추서)은 작계대로 매복에 들어갔다.
중대본부 매복대 운용은 “중·소대본부 대원들도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중대장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매복 지점은 여단본부 인근의 작은 교량 부근이었고, 교량 건너편은 월남 민병대가 경비하고 있었다.
미덥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군이긴 했다. 그러나 월남 민병대가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 M16 소총을 움켜쥔 모습으로 전사한 전우
베트콩과 내통한 월남 민병대가 27중대 매복 분대 병력과 위치를 베트콩에게 흘린 뒤 몰래 빠져나가자 베트콩이 선제 공격, 졸지의 피습으로 인명 피해가 속출했다.
대대장은 송재신 중대장의 건의에 따라 여단에 반격대 투입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G3는 “중대 야간 반격대 투입은 위험하다. 특공중대를 투입하겠다”며 불허했다.
특공중대가 중대 규모 베트콩을 제압, 현장을 장악했을 때 생존자는 3명, 나머지 매복대원 10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월남 도착 1개월 16일 만의 절통한 전몰이었다.
전사자는 상병 박용출(묘번 1126), 상병 최문길(묘번 1127), 상병 김학태(묘번 1128), 상병 장대환(묘번 1129), 상병 최상진(묘번 1130), 상병 이병준(묘번 1131), 상병 신찬식(묘번 1132), 중사 서정수(묘비번 1138), 중사 장대식(묘번 1134).
10명의 푸르른 청춘들은 월남의 조그만 수로(水路)에서 장렬하게 싸우다 그렇게 숨져갔다.
그중 김학태 상병은 M16 소총을 움켜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고영배 상병은 부모가 고향 제주도로 고혼을 데려가 서울현충원 26묘역에는 이들 9명의 묘만 있다.
아홉 명의 영령. 그들은 두터운 우정과 용감한 기백으로 자유를 잉태하려 용전하던 자랑스러운 청룡이었다.

추모리본을 부착하고 있는 송재신 중대장.

■ 김학태 상병 유족과의 조우
올해 나이 88세, 백발의 송재신 중대장은 평생 잊지 못한 채 가슴에 묻어 두고 있는 전몰자 9명 묘비마다 ‘불멸의 충혼, 추모’의 리본을 부착한 뒤 술 한 잔씩을 올리고 두 번 절을 했다.
“미안하다. 살아서 같이 돌아오지 못해…”
55년 전 중대장이 무릎을 꿇는 사이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걸리는 전남 신안군 흑산면 하태도에서 올라온 최갑수(해병 180), 박상두(해병 181기), 윤재화(해병 181), 부산서 상경한 황시원(해병 172), 최정구(해병 183) 다섯 해병은 연신 눈물을 훔쳤다.
해마다 이들 9명의 묘소엔 국화 한 송이씩이 놓인다.
“현충일마다 먼저 간 9명의 전우들이 눈에 밟혀 거르지 않고 찾아온다”는 윤재화 해병이 헌화의 주인공이다.
1969년 전역 후 53년째 해오고 있지만 그가 유족을 만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6월 5일 송재신 중대장을 포함한 참배자들은 2소대 본부 김학태 상병(해병 181, 군번 9336389)의 동생 김안태 씨와 그의 두 아들을 만났다.
송재신 중대장은 55년 만에 처음 만난 유족들을 따뜻이 위로하고, 해병 1099기로 전역한 故 김학태 상병의 조카인 김민수 군을 각별히 격려했다.
김안태 씨는 “중대장님께서 현충일에 맞춰 멀리 미국에서 찾아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고령임에도 영령 9위에게 일일이 술잔을 올리고 재배(再拜)를 하셨다. 또한 형님의 전사 경위도 알려 주셨다. 중대장님의 진솔한 부하 사랑이 느껴졌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故 김학태 상병 유족과 27중대원들. 가운데가 송재신 중대장.

■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본때를 보여주자!”
송재신 중대장과 해병대사관 35기의 인연은 그가 1966년 3월 해병학교 중대장직에 보직되면서 맺어졌다.
그는 1956년 해사 14기로 입학, 1960년 임관 후 1961년 5월~1964년 7월 공정식 장군이 제6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취임하기 직전까지 부관으로 근무하다 도미, 1년간의 미 해병학교 OBC과정을 마치고 1965년 귀국했다.
1966년 5월 28일 그가 교육·훈련시킨 35기 사관후보생 142명은 소위로 임관했고, 다시 16주간의 기초반(OEC) 교육에 들어갔다.
그런데 8월 8일 뜻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이른바 ‘8.8사건’이었다.
사건은 주말 부산에서 외박을 마치고 귀대하던 35기 기초반 소위 7명과 김해공군비행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공군 소위(공사 14기 조종반 학생) 3명이 사소한 시비 끝에 벌인 다툼이 발단이 됐다.
부산발 진해행 시외버스 안에서 벌어진 격투 끝에 공군 소위들이 두들겨 맞았는데 때마침 현장을 목격한 공군 사병이 공군비행학교에 비상연락, 흥분한 공군소위 16명과 기간 사병 등 30여 명이 비행학교 스리쿼터 2대로 창원군 웅동면까지 쫓아와 35기 기초반 소위들을 집단폭행했다.
외박 귀대 후 이 소식을 전해들은 35기 기초반 장교들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입을 모았다.

■ 송 중대장, 8.8사건으로 인해 파면 위기 겪기도…
비상대책회의의 “응징 결정”에 따라 8.8 오전 3시 기상, 총원 142명 중 환자와 당직 근무자 13명을 제외한 129명이 진해 경화역에서 학교 당국 모르게 열차를 타고 진영역에서 하차, 버스와 화물트럭 편을 이용해 공군비행학교 조종반 장교 숙소 기습공격에 나섰다.
졸지에 허를 찔린 공사 14기 조종반 학생 40여 명이 침상 위로 고꾸라졌고, 수백 명의 공군 사병들까지 가세하면서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쌍방 간에 43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창군 이래 최대의 집단 싸움은 즉각 진해 저도 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됐으며, 도하 신문들은 ‘공군·해병들 편싸움’ 제하에 대서특필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해병대 소위와 공군 조종사가 부딪혀 그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8.8사건’으로 송재신 중대장은 ‘부하범죄 불진정’, ‘사령관훈령 제1호에 대한 위반’ 죄명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최종 군검찰의 공소 취하로 풀려났다. 그러나 진해교육기지는 그를 징계위원회에 회부, 파면조치했다.
해병대사령관의 꿈을 안고 해병대로 전과했던 그에게 파면조치는 너무나 가혹한 처벌이었다.
송재신 대위는 그가 공정식 사단장 부관으로 근무할 때 포항기지사령관이었던 국방부 정보국장 김용국 해병 소장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 우여곡절 끝에 월남전참전, 큰 전과 올려…
김용국 소장은 그에 대한 처벌은 “일사부재리 원칙에도 어긋나는 것”이라 지적하고 국방부 인력차관보(육군 소장)를 찾아가 소명할 수 있도록 다리를 나줬다.
인력차관보는 “해병대사령관과 국방장관 결재가 난 파면 결정을 뒤집기는 어렵다. 그러나 항고심사위에 출석, 발언할 기회는 주겠다”고 했다.
송재신 대위는 항고심사위원회에 출석, 저간의 상황을 설명했고, 극히 이례적으로 해병대 대위로의 복직명령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진해교육기지로 원대복귀했고, 때마침 청룡부대 증파 5대대를 편성중이던 이화출 중령의 권유로 27중대를 이끌고 월남으로 갔다.
8월 30일 통한의 매복작전 인명 손실 후 27중대는 추라이 남쪽 32km 바탕간반도 상륙작전(용화작전, 9.5~10.30)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다낭에서 미 해군 함정에 승선한 27중대는 배속 미 해병 수륙양용차 1개 소대, 미 해군 해안분대 1개 반과 함께 내륙으로의 베트콩 무기운반 거점이었던 바탕간반도에 상륙, 지역평정작전에 나섰다.
서울 여의도 절반 크기의 작전지역 동굴탐색 및 지역 내 베트콩과의 전투는 56일간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배속 미군 장교 2명이 송재신 중대장의 부대 운용과 중대 작전상황을 상급부대에 ‘1일 보고’, 이 ‘1일 보고’가 근거가 돼 대대장 이화출 중령은 미 동성, 송재신 대위는 미 은성훈장을 받았다.
한·미·월 합동 용화작전은 바탕간반도 일대의 적 탐색·소탕 및 5대대 기지 개척 목적 아래 실시된 작전이었다.

■ 송 중대장-35기생, 영원히 지속될 인연
1968년 귀국한 그는 월남서 발병, 군의관이 제때 손을 쓰지 못해 악화된 충수염으로 대·소장이 유착, 큰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뒤끝이 안 좋아 1969년 말 의병 제대, 1973년 3월 미국으로 이민했다.
미국 정착 후 부동산 임대업으로 경제적 기반을 닦은 그는 5년 전 LA 외곽 소재 ‘너싱 홈(양로병원)’을 인수, 장남에게 경영을 맡기고 지금은 노후를 즐기고 있다.
35기에겐 ‘형님’ 말고 그를 부르는 호칭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대장’이다.
‘대장’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35기 동기회에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
그는 35기 임관 50주년(2016.5.28.) 기념문집 ‘질풍’에 기고한 ‘인연’ 제하의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와 35기의 인연은 해병학교 중대장과 사관후보생으로 시작되어 한때 어려운 고비도 있었지만 그 고비가 우리를 더욱 결속시켜 2015년 35기 동기회 대구 가을 여행(11.7.)께 ‘형과 아우의 연’을 맺게 했고, 송정(松井)이란 호(號)도 갖게 되었다.
35기와 내가 사제지간을 넘어 형과 아우 한 가족이 된 소중한 인연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앞으로 생을 마칠 때까지 아우들과 제수씨들에게 끊임없는 관심과 성원을 보낼 것이다.”
합동 참배를 마친 30명은 구내 ‘만남의 집’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한 뒤 그 자리에 동석할 수 없어 안타까운 영령들을 뒤로 한 채 귀갓길에 올랐다.
일행이 지하철 4호선 동작역 역사로 이어진 지하보도에 내려섰을 때 ‘죽음’이란 제하의 시판(詩板)이 발길을 멈추게 했다.
시인은 조금 전 더는 살아 만날 수 없게 된 전우들을 작별하고 온 노병들에게 이렇게 위로하고 있었다.

먼저 가신 호국영령께 묵념.

살아남은 자여, 너무 슬퍼하지 마라!
임이 먼저 간 세상엔 일찍 가고 늦게 가는 차이만 있을 뿐
언젠가 우리들은 다 그곳에 모인다.
그때 슬픔도 기쁨도 못다한 이야기도 함께 나누면 된다.
살아남은 자여, 너무 슬퍼하지 마라.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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