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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挑戰)은 아름답다

기사승인 2021.08.31  09:4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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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은(해병 459기) 전우

‘8년 만에 전국 500대 명산 등정, 500번째는 포항 운제산 대왕암(천자봉)을 오르다’
박주은 전우는 아들이 군 입대하자 해병대 아버지의 강인한 기(氣)를 이어주기 위해 100대 명산을 선정, 아들의 복무기한 동안 오르기로 결정하고 실천에 옮겼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니 힘이 솟고 정신이 살아났다.
‘그렇다! 이젠 나의 길을 개척하자’ 마음먹고 다시 목표를 설정 ‘안 되면 될 때까지’ 해병대정신으로 500번째 명산을 지난 8월 21일 등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등산기를 수첩에 옮겨 적기 시작하여 한 권의 단행본량이 되었다.
그 외에 헌혈을 통해 자신의 삶을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일에 동참, 고2 때 시작했던 헌혈을 100회(현재 123회) 이상 하여 대한적십자사 ‘명예장’을 받았다.
또한 한국GM해병대전우회(현 회장 이종성·해병 577) 활동을 통해 전우애를 나누며 사무국장으로 봉사하기도 했던 열정적인 해병대전우다.
걸으며, 내 피를 남에게 주며, 글을 쓰는, 생각하는 해병대 박주은 전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신동설 발행인】

한국의 명산 500번째 등반 기념촬영하는 박주은 전우.

■ 백대명산 도전의 이유
요즈음 여가시간을 활용하여 하나의 목표를 정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다.
몸매 만들기, 자전거 전국 일주하기, 백두대간(白頭大幹) 종주하기 등 건강도 지키고 자신의 인내력 테스트 등 여러 부류가 있다.
도전이란 어떤 것이든지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한다.
중도에 포기한다 하더라도 좌절할 일이 없어 매력을 느끼나 보다.
나는 명산도전 목표를 세우고 하나하나 정복하다 보니 어느새 명산 500개 정상을 정복했고 마지막 500회는 해병혼이 담겨 있는 포항 운제산(대왕암) 등반을 택했다.
학창 시절 우연히 가본 덕유산 구천동 절경에 빠져 산을 좋아하게 되어 가까운 산을 주로 다니다가 아들 입대를 계기로 그 아이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백대명산에 도전하여 함께 용기와 자신감을 공유키 위해 시작했다.

■ 산은 가슴에 품은 영혼이고 엄마
처음엔 100大 명산 정복이 목표였는데 다시 200大가 되었고 500大까지 완등을 하였다.
추우나 더우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많게는 하루에 3개 산도 오르고 겨울에 차가 고속도로에서 고장이나 추위와 싸우면서 견인했던 일도 있었다.
밧줄이 끊어져 낭떠러지로 굴러 목숨을 잃을 뻔도 했고, 등산로를 잃어 몇 시간을 계곡을 타고 내려왔던 일을 겪으면서 지난 8년 동안 중단 없는 도전이 지속되었다.
비록 준비성도 없고 정보도 없이 시작하여 시행착오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 시행착오는 즐거운 경험이 되었고 하나하나 산을 정복할 때마다 숫자 하나가 얼마나 크고 소중한지 알게 되었다.
600大 도전 결심을 말하자 아내는 지금까지 경험을 살려 무리하지 말고 산을 즐기라고 충고한다.
사실은 그랬다. 오로지 정상정복에만 목표를 세워 숙제하듯 바쁘게 다녔으니까….
지금까지의 도전을 위한 도전을 떠나 낭만을 즐겨가며 여행하듯 계속하련다.
혹자가 “산이 뭐길래 다시 내려올 산을 미친 듯이 다니느냐?”고 물으면 “산은 가슴속에 품은 영혼과 같고 따뜻하게 미소 짓는 엄마 얼굴이야”라고 말했다.

■ 도전은 아름다운 해병대정신이다
산이란 단지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만이 아니다.
산은 가만히 머물러 있는 것 같지만 그 산속에는 사계절 변하는 나무와 꽃, 그리고 여러 생명체들이 계절마다 햇살과 바람에 따라 움직이며 변화를 주는 것이다.
산은 거대하고 위대하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움과 신성한 기운과 도력이 있는 곳이다.
정겹고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위로받기에 충분한 자연의 위대함에서 스스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다.
교만한 마음으로 산행을 하다간 희생당할 수 있는 비정함도 있다.
그러니 산과 친하되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누구나 도전을 향해 시작하지만 성공의 문은 결코 순탄치 않으며 장애가 있는 법이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를 세우고 “할 수 있다” 외치고 시작하지만 작은 것을 경시하고 더 큰 도전을 시도한다면 무리수가 따를 것이다.
도전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그 누구보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현 상황에 미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된다.
그래서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가 보다.
내가 도전하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그것이 바로 아름다운 것으로 향하는 출발지점인 것이다.
도전을 주저한다면 평생 도전을 향해 도전의 발걸음을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해병대 슬로건은 ‘충성, 명예, 도전’이다. 해병대 구호는 ‘안 되면 될 때까지’이다.
이 두 가지는 해병대에게 도전정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거기에서 강인한 해병대정신이 탄생되었음을 우리는 보아왔다.
해병대 도전정신이 우리의 삶과 자세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나는 500대 명산 정복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필승!

한국GM해병대전우회원들과 함께 단체사진.

○ 박주은 전우가 말하는 ‘피(blood) 스토리’

박주은 전우는 현재까지 123회 헌혈을 실시, 대한적십자사 ‘명예장’을 받았다.

■ 헌혈의 시초는 생계수단으로
피(血)는 사람에 따라 약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체중의 8~9% 정도다.
즉, 70kg 체중이라면 5.6L~6.3L리터 정도며 2홉들이 소주 14병 정도다.
그중 30%의 피가 모자라면 생명에 지장이 있어 수술이나 사고로 피가 부족한 사람은 수혈을 받아야 한다.
인류 최초로 사람에게 수혈을 시도한 사람은 1667년 루이 14세 주치의사인 데니스(Denis)가 송아지 혈액을 15세 소년에게 수혈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사람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한 것은 1829년 산부인과 의사 비언텔(Biundell)이 산모에게 수혈한 것이 처음이다.
진정한 의미의 현대적 수혈은 사람마다 각기 다른 혈액형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00년 카를란트 슈타이너(Karl Landsteiner)가 처음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1954년 이전까지는 미군에 의지, 혈액을 공급 받아 수혈을 받았지만 미군이 자국 군인들한테만 수혈을 하는 법이 제정되어 혈액 수급이 끊기자, 지금의 백병원에 민간 혈액원이 처음으로 생겼고 헌혈이 아닌 매혈(피를 사고 파는)로 혈액을 충당했다.
당시는 혈액 보관 시스템이 없어 당일 필요량만 매혈을 했기에 밤새며 기다려 번호표를 받아서 매혈을 했고, 번호표를 되파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많았다.
무직자는 생계 조달을 위해, 청소년 학생들은 학비 조달을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피를 팔았는데 380cc를 뽑으면 1000환(자장면 한 그릇 20환 시절)과 미군용 통조림 1통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1958년, 국립중앙혈액원이 생겨 매혈로 혈액 수급을 계속하다가 1975년 10월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에서 전담하면서 매혈 제도를 없애고 헌혈로만 혈액이 공급되었다.

■ 헌혈의 종류
헌혈 종류는 혈액의 모든 성분을 헌혈하는 전혈헌혈(全血獻血)과 혈장성분을 헌혈하고 나머지 혈액성분은 헌혈자가 뒤돌려 받는 성분헌혈(成分獻血)로 나눈다.
전혈헌혈은 일 년에 5회밖에 할 수 없고 성분헌혈은 14일 후면 다시 받을 수 있으며, 시간은 전혈헌혈은 15분 정도며 성분헌혈은 40분 정도 걸린다.
헌혈 후 15일 정도면 헌혈 결과가 나오는데 이 결과에서 헌혈자의 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
필자는 고2 때 최초로 헌혈을 했다.
헌혈 버스가 학교로 와서 적십자 관계자가 헌혈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한 뒤 희망자를 받았을 때였다.
한 반에 한두 명밖에 안 되는 헌혈자였던 시절이었는데 친구들이 이것저것 물어보았던 일이 생각난다.
그 후 해병대로 제대를 해 고향에 갔는데 동네 어르신이 농기계에 큰 부상을 입었지만 수혈을 제때 받지 못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 틈틈이 헌혈에 동참했고, 지금까지 100회(현재 123회) 넘게 해서 적십자 총재로부터 ‘명예장’을 받기도 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헌혈 버스에서 헌혈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천사 같은 간호사 누나의 손길이 스칠 때마다 야릇한 감정으로 헌혈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헌혈이 끝나면 수기로 된 헌혈증서와 초코파이 두 개와 음료수 그리고 조그만 선물을 주었고 한참 식성이 좋았던 시절에 초코파이가 더 먹고 싶어 하나만 더 달라고 하면 규정량밖에 안 된다고 거절당했던 일도 있었다.

■ 헌혈은 해병대 전우애와 이웃사랑의 실천
지금은 ‘헌혈의 집’이 생겨 쾌적하고 편안하게 헌혈할 수 있으며, 음료수와 초코파이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이 달라진 모습이다.
우리나라는 절대적으로 모자라는 피 부족 국가다.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 수술을 하려면 헌혈증을 요구하는 게 당연시되었고 직접 헌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 같이 근무하는 동료가 급하게 뛰어다니기에 물어보니 장모님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세 사람의 헌혈이 필요하다고 하기에 흔쾌히 헌혈을 해주었다.
그 후 우리는 피를 나눈 사이라고 해서 친하게 지내고 있다.
과거에는 헌혈을 하려면 간단한 설문지 작성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건강 체크 등 무척이나 까다롭다.
“헌혈은 사랑입니다.”
헌혈 결격 사유가 없다면 용기를 내 동참하여 건강도 체크하고 봉사의 참뜻을 느껴 보는 일거양득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큰 가치는 내 피를 섞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해병대는 전장에서 쓰러진 전우를 결코 놔두지 않고 함께 동행한다고 배웠다.
그것이 전우애라면 헌혈은 이웃과 형제 모두와 동행하는 고귀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필승!
※ 박주은(해병 459) 연락처 010-9528-6550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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