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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전략기동부대, 이렇게 탄생했다

기사승인 2021.04.16  12: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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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창설 72주년을 맞아 본지는 해병대 창설 과정 비화를 해안(海晏) 정채호(특과장교 2기) 선생 저 ‘덕산에서 월남까지’ 내용을 발췌해 연재한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들에게 해병대 창설 당시 숨겨진 이야기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편집팀】

여·순 반란사건 당시 반란군을 진압하는 국군의 모습

■ 해병대 창설의 계기 된 ‘여순지구 반란사건’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했던 여수·순천지구의 반란사건은 그것이 비록 해방 직후의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임엔 틀림이 없었으나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기의 우리 해군에서 장차 상륙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병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던 것은 실로 고무적이며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해병대 창설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고 있는 여·순사건은 그 당시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제14연대 내에 침투, 조직돼 있던 남로당계의 공산주의 신봉자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사건으로서 그 주모자는 동 연대의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 및 홍순석 중위 등이었고, 주동자들은 이들 주모자를 비롯한 약 40명의 내부 프락치들이었다.
이들 일당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4·3 사건을 일으킨 한라산 공비들에 대한 정신적인 지원을 하는 데도 그 일단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여수의 40연대가 거사의 기점이 되어 연쇄적인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고자 함이었다.
주동자들은 연대 탄약고와 무기고를 접수, 반란군을 무장시킨 다음 차량을 동원하여 그 길로 여수 시내로 돌입, 모든 지서와 경찰서를 닥치는 대로 습격하는 가운데 순식간에 시내 일원을 점령하고 말았던 것이며, 순천에 배치돼 있던 3개 중대도 선임 중대장인 홍순석 중위의 주동과 호응 하에 연쇄적인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순천 시내 역시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 마침내 여수와 순천은 일찍이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대학살의 현장으로 변했다.
여수와 순천에서 반란사건이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게 된 육군에서는 당시 광주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송호성 준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결과 사건 발생 4일째인 23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육군부대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자 김지회를 비롯하여, 지창수, 홍순석 등 주모자들은 반란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도주해 버렸으므로 육군과 전투경찰대에선 이들을 섬멸하는 날까지 계속 소탕전을 전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정식 사령관은 여·순 반란사건 당시 303정장으로 사건을 해군에 최초 보고했다.

■ 공정식, 여·순 반란사건을 처음 보고하다
여·순 반란사건과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관련을 맺었던 사람은 303정의 정장 공정식 대위였다.
당시 ‘맥아더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인 어선을 나포하는 임무를 띠고 해상을 경비하고 있던 그는, 그로부터 며칠 전 서귀포 근해에서 나포한 2척의 어선을 여수세관에 인계하기 위해 여수에 도착했던 바로 그날 밤 외출 중 요란한 총성에 놀라 황급히 귀항하는 길에 반란군 병사들에게 붙들려 부둣가의 경찰관 파출소로 연행되어 있다가 그 전에 한두 번 함정에 놀러 온 일이 있었던 면식 있는 2명의 육군 사병들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위기를 모면, 부둣가의 함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귀함을 하게 된 그는 즉시 배를 해상으로 진출시키는 한편 반란사건을 처음으로 해군본부에 타전했고, 또 그 다음날 아침에는 부둣가의 한 지점에서 애타게 구조를 요청하고 있는 수명의 장교들(1여단 참모장과 14연대장 일행)을 보트로 구출, 해본의 명령에 따라 당일 오후 그들을 부산으로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 다음 303정은 명령에 따라 진압작전에 참가하게 된 육군 제5연대(부산 지구 주둔 제1대대(대대장 김종원 중령) 장병들이 승선한 수송선(항만청 LST)을 호위하여 여수로 직행, 27일의 여수 탈환작전에 함께 참가했다.

손원일 당시 총참모장은 해병대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 만약 육전대(해병대) 같은 특수부대가 있었더라면…
지원작전을 끝마친 뒤 해군의 임시 함대 사령부에선 작전 결과에 대한 보고서를 상부에 제출했다.
그 보고서 내용에는 아군 함정에 방어무기가 불충분하여 육지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던 점을 비롯해 공격무기의 빈약과 동일 파장으로 인한 통신(무전) 연락상의 문제점 등 주로 작전 과정에서 제기된 절실한 문제점 등이 있었다.
또한 이러한 문제점 외에 그 보고서는 그 결론적인 부분에서 하나의 중요한 건의를 하고 있었다.
그 건의란 곧 ‘만약 해군에서 육전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하는 평범한 가정을 근거로 한 것이었는데 결국 신현준 중령에 의해 직접 제기되기도 했던 이러한 건의사항은 이심전심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던 손원일 총참모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의 현실적인 꿈과 욕망으로 부각되었다.
마침내 손원일 총참모장은 특설 기지 참모장 신현준 중령과 법무관 강대형 대위 및 민용식 소위를 특수 전투 부대 창설을 위한 참모 연구서 작성요원으로 임명하여 해군본부(서울)에서 활동을 개시토록 명령했고, 이러한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다시 해군본부 및 진해 특설 기지 사령부의 수뇌부들은 연일 머리를 맞대고서 이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손원일 제독과 신성모 장관(당시의 내무 장관)은 일찍이 외국으로 유학하여 항해학을 전공한 다음 실무에서 항해술을 익히고 개발한 해양의 선구자들이었다.
즉 손 제독은 남경(南京) 중앙 대학 항해과를 졸업한 뒤 독일에 유학, 유럽을 다니면서 항해술을 경험하다가 해방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이였고, 신 장관 역시 상해 오송(吳松) 상선 학교와 남경 항해대 및 런던 항해대를 차례로 거친 다음 영국에서의 선장 생활과 인도 상선회사의 고문직 등을 역임하다가 해방과 함께 귀국한 이었다.
그 시기에 해외 시절 때부터 서로 친분이 두텁던 이들 두 선각자는 조국으로 돌아온 뒤 처음에는 비록 서로가 택한 표면적인 진로가 달랐는지는 모르지만 뜻과 포부만은 광복된 조국의 믿음직한 해군과 튼튼한 국방에 두고 있었다. 이들은 과거(2차 대전을 전후해서) 상해의 조계(組界)와 유럽 등지 및 태평양 전쟁을 통해서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느끼는 가운데 어느 때부터였는지 그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미국의 해병대와 영국 해병대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기에 이들 대 선각자들은 여·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도 그러한 잠재의식을 가끔 대화 속에 떠올려 그들이 그리고 있던 그 소망스런 해병의 상에 관한 언급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해군 내의 인적 자원 문제와 관련해 일본 해군 출신 장병들이 주축이 돼 있던 당시의 해군 병력 중에는 상당수의 육전대(일본 해군) 출신자들이 있었을 뿐 아니라 육전에만 경험이 있는 만군(滿軍) 출신 장병들과 군대 경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에 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특히 이러한 자들, 즉 육전대 출신자들과 육전 경험이 있는 장병들 및 군대 경력이 전혀 없는 자들을 어떻게 해야 유효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내심 궁리를 하고 있던 손원일 제독은, 마침 여·순 사건을 계기로 해병대의 필요성이 절감되자 이러한 인재들을 써먹을 데는 바로 여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쩐지 든든한 마음으로 일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안성맞춤과도 같은 존재들이었으리라. <계속>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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