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태옥(부사관 16기) 법무법인 (유)세광 사무국장
장태옥 노병 ▲ 표창 ▲ 군 경력 ▲ 사회 경력 |
■ 들어가는 말
해병대 창설 72주년이 다가온다. 해병대 72년을 빛낸 노병들의 발자취를 찾아본다.
장태옥 노병은 1958년, 6·25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기에 해병대 부사관 16기로 입대하여 법무관실 군법회의요원전형고시에 합격 후 해병대 법무병과의 중추신경 역할을 하다가 1990년 32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현재 노령임에도 법무법인(유한) ‘세광’에서 사무국장을 맡아 노익장을 과시하는 열광적 해병의 일생을 가고 있는 중이다.
■ 해병대 법무실 요원의 길
1958년 장태옥 청년은 경북문경고등학교 제5회를 졸업하고 해병대 부사관 제16기로 자원입대했다.
故 장석희(해병 2) 작은아버지가 “해병대에 가서 강인하게 살아라” 하시는 권유로 부사관의 길을 택했다.
당시만 해도 해병대 부사관이 얼마나 고행길인 줄 잘 모르고 들어간 것이다.
매일 ‘빳다’와 기합이 상관으로부터, 또는 부하 해병에게 군기 잡으라는 압력 등 성격이 온순한 장태옥 하사에게는 육체적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컸었다.
그러던 중 군법회의요원전형고시가 있었다.
‘그렇다. 내가 선택한 해병대를 가장 멋있게 하고 싶은 병과다’ 결심을 하고 날밤을 지새우며 육법전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하여 엄청난 경쟁자를 물리치고 합격했다.
합격 후 법무병과를 취득하고 배치된 곳이 1962년, 해병대 제1사단 법무참모실이었으며, 그 당시 모셨던 분이 김기춘 전 법무장관, 박찬종 전 의원 등 역사에 기록된 분들이었다.
그 외에 해병대 및 해군 각급 부대 법무실에 근무하면서 이인복, 민일영, 박시한 전 대법관 및 이진성 전 헌법재판소장 등 그에 버금가는 유명 법조인들을 섬기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 1965년 월남전 참전
1965년 10월, 월남전이 한창일 때 주월한국군사령부(현 호찌민, 당시 사이공) 법무참모부에 전시 국법회의요원 및 검찰수사관으로 선발됐다.
1967년 귀국 시까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월남에서 비록 비전투요원이지만 전투요원 못지 않게 온 정열을 다했다.
그로 인해 고엽제 고도 증상의 참전유공자가 되었다.
■ 해병대의 긍지
“선배님은 어떤 정신으로 살아오셨습니까?” 질문에 “입대 후 지금 팔순이 넘기까지 나의 가슴에는 빨간 명찰의 긍지가 뛰고 있습니다. 해병대 배지를 달고 교회에 다니는 장로라 하며 그래야 해병대의 솔선수범, 정직함, 당당함이 더욱 빛날 것 아닙니까” 하며 말했다.
“군 생활 중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무엇입니까?” 질문에 “1965년 해병학교 35기 교육생들이 김해공군기지 습격사건 당시 교육생들을 구속 수사할 때 진해기지 법무참모실에 근무하면서 조서 작성에 마음고생했던 일이 잊히지 않습니다” 말하는 노병의 눈가에 회안의 미소가 흐른다.
그는 해병대의 전통적인 엄격한 군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해병대 각급 부대 법무참모실에 근무하면서 예하 부대에서 국법호의참여 검찰수사관으로 범죄수사의 일익을 담당했으며, 군 형법 강의를 통해 군 기강 확립에 일조한 것이 해병대의 긍지로 남아있다고 대답했다.
■ 三代에 이르는 해병대 혈통
아들 장오봉(부사관 190기), 손자 장지욱(해병 1262기·1사단 예하대대 근무)에 이르기까지 삼대에 걸친 해병 명문가다.
“장손자며 외동이인 지욱이게 한 번도 면회를 안 갔습니다. 오직 스스로 어떤 난관이라도 돌파하여 굳게 일어서는 진짜 해병대가 되길 바랄 뿐입니다.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아들(장오봉)이 더 잘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집안의 부사관 같지요. 부사관은 아랫사람에게는 따뜻한 엄마 역할을 하고 윗분에게는 명령에 잘 따르는 본을 보여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집은 상경하애 해병대정신이 철칙입니다.”
장태옥 노병의 무궁한 앞날을 기원합니다. 장태옥 해병 파이팅!
【취재=신동설 발행인, 사진= 박흥배 보도국장】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