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대한민국 최고의 작전지휘관, 故 백선엽 장군

기사승인 2020.07.28  15:38:40

공유
default_news_ad2

다부동 사수… 백척간두 선 대한민국 살린 구국의 영웅
이승만 대통령 찬사 “한국의 아이젠하워, 나의 어금니”
미군 지휘관들도 높이 평가 “가장 존경한 군인이자 스승”

대한민국 최초 육군 대장 백선엽 장군

▲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한국의 아이젠하워, 백선엽 장군
故 백선엽 장군은 생전 국내외 언론 및 학계, 그리고 미군 장성들로부터 ‘6·25전쟁 영웅’ 또는 ‘살아있는 전설적인 전쟁영웅’으로 널리 회자됐다.
백 장군은 6·25전쟁 시 가장 위기였던 낙동강 방어선에서 임시수도 대구의 관문인 다부동을 사수하여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살린 구국의 영웅, 북한의 수도 평양을 기동력이 월등한 미군 부대와의 경쟁에서 이긴 북진작전의 선봉장, 1951년 3월 15일 1·4후퇴 때 공산군에게 빼앗겼던 수도 서울을 재탈환한 역전의 명장이다.
그는 그런 전공으로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고, 나아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의 아이젠하워’라는 칭송을 받았던 장군이었다.
그렇다면 백 장군은 어떻게 그러한 위업을 이룩했고, 그와 같은 평가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이는 초대 2군사령관을 지낸 강문봉 장군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나왔다. 강 장군은 박사논문 주제를 6·25전쟁 시 육군참모총장의 리더십에 대해 썼다.
그는 이 논문을 위해 6·25전쟁에 참전한 육군 장성 200명에게 설문지를 보내, 누가 전쟁 시 최고의 참모총장인가를 가려냈다. 조사에서 백 장군이 6·25전쟁 시 국군 지휘관 중 최고의 지휘관으로 뽑혔다.
강 장군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백 장군을 군인 중의 군인으로 평가하면서, 백 장군의 장점은 자기변명을 하지 않은 채 사필귀정의 자세로 살아왔고, 자신의 밝고 깨끗한 마음만 믿고 행동했으며, 평생을 고독과 싸우며 살았던 장군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백 장군을 만사에 정력적이며 열성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가 하면, 인내심과 겸허함, 부하에 대한 기억력, 필승의 신념, 매사에 철저하게 확인을 하는 지휘관으로 평가했다.

■ 이승만 대통령 ‘나의 어금니’
특히 백 장군이 대인과의 협조에 전력을 기울이고, 한미양국 간의 긴밀한 관계 확립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 일부 사람들이 백 장군의 그런 대미협조를 지나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은 국익을 고려한 행동으로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 결과, 강 장군은 백 장군을 한국군 장성 중 최고의 작전지휘관일 뿐만 아니라 가장 훈련을 잘 시키는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백 장군의 이러한 능력과 장점이 결국 그를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으로 올려놓게 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그런 백 장군을 ‘나의 어금니’라고 부르며 아꼈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백 장군에 대한 신뢰는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은 백 장군을 두고, “나는 백 장군이 있으므로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백 장군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장병과 더불어 불속이나 물속이라도 기꺼이 뛰어들 훌륭한 지휘관입니다”라며 격찬했다.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받기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매우 드문 일일 것이다.
백선엽 장군에 대한 높은 평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전쟁 초기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던 정일권(육군대장 예편·국무총리 역임) 장군도 백 장군에 대해서는 남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은 군 경력 상 공통점도 많다. 만주봉천군관학교 동문이라는 것, 광복 후 이북에서 월남했다는 것, 두 번씩 육군총장을 역임했다는 것, 합참의장을 끝으로 군을 떠났다는 것 등이다.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은 다정한 군의 선배이며 후배 관계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군에서의 두 사람의 관계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늘 경쟁 관계였다.

■ 친구이자 라이벌, 정일권 장군
처음에는 백 장군이 정 장군의 경력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정 장군의 지위와 경력은 백 장군을 압도했다. 정 장군이 총장일 때 백 장군은 사단장이었고, 중장 계급도 정 장군이 1년 앞서 달았다.
정 장군은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지막 관문인 대장 진급에서 정 장군은 백 장군에게 밀렸다.
다 이겨놓고 마지막에 진 셈이다. 자존심 강한 정 장군의 입장에서는 엄청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백 장군이 대장 계급장을 단 날 밤잠을 설쳤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장군은 백 장군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정 장군은 1980년 중반에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백 장군에게 가슴 속 깊이 묻어둔 감정을 토로했다.
“백 장군은 1953년 1월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승진한 것을 비롯하여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 백야전사령관, 2군단장, 육군대학 창설총장, 1야전군사령관, 7대 및 9대 참모총장 등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중추 요직을 두루 거친 군력은 그대로 장군의 탁월한 장재(將才)를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월한 경력을 거치면서도 백 장군은 항상 겸손하고 아량과 도량이 넓은 인정어린 수많은 가화(佳話)를 남기고 있습니다. 백 장군은 선후배의 서열에 대한 예절이 근엄하여 서로 노경(老境)에 접어든 지금도 나를 언제나 형님으로 대해 주곤 합니다. 내가 자기보다 3년 먼저 태어나서입니다. 그리곤 나의 흠을 따뜻이 감싸주는 참으로 고마운 성우(星友)입니다.”

■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
백 장군에 대해서는 미군 지휘관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6·25전쟁 때 백 장군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과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도 백 장군에 대해서 높이 평가했다.
미군의 두 장군은 백 장군에 대해, “그는 미군의 가혹한 시험을 통과한 한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작전지휘관”이라고 호평했다.
한미연합군사령관을 역임한 라포트 장군도 백 장군을 가장 존경한 군인이자 스승이라고 했고, 벨 장군도 백 장군을 세계 각국의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이자 참 군인으로 칭송했다.
결국 백 장군에 대한 미군 지휘관들의 이러한 평가가 백 장군을 2013년 ‘명예 미8군사령관’으로 선정하게 했다. 그런 점에서 ‘백선엽한미동맹상’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학계와 언론계에서도 백 장군에 대한 평가에는 인색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 장군은 1995년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 속에 선정됐다.
여기에서 백 장군은 국군 제1의 야전지휘관으로 선정됐다. 이로써 백 장군은 한국 최고의 작전지휘관이라는 입지를 굳혔다.
그러면 무엇이 그를 최고의 작전지휘관이 되게 했을까? 이는 그의 천부적 자질, 사려 깊은 배려와 겸허함, 뼈를 깎는 노력과 성실성, 사선에서 터득한 전쟁 원리를 응용한 결과였다.
백 장군은 전임 참모총장인 정일권 장군이나 이종찬 장군의 학력이나 경력에 비해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는 이들 총장들이 일본육사와 미 지휘참모대학을 나온 것과는 달리 만주군관학교 학력이 전부였다. 백 장군은 학벌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전장에서 학벌은 필요 없다. 전장에서는 오직 작전을 잘하는 지휘관만이 중요할 뿐이다. 유능한 지휘관은 지형을 얼핏 보고도 공격에 유리한지, 방어에 유리한지 직관으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며 과거의 경력보다는 현재의 능력을 중요시한다.

강원도 양구 펀치볼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는 한미 양국의 군 수뇌부. <좌측부터>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 대장,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대장, 미 제10군단장 바이어스 소장,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

맥아더 등 美 전쟁영웅 영향 받으며 야전지휘관으로 성장
최장수 전투사단장 거쳐 참모총장 오른 입지전적인 장군
“백선엽 장군은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었다”

■ 평양과 서울을 탈환한 유일한 지휘관
그럼에도 백 장군은 미군의 신뢰를 받으며 누구보다 잘 싸웠다. 이는 평양사범학교의 교련, 군관학교의 전술학과 전사교육, 미 고문관에게서 습득한 전술과 영어가 바탕이 됐다.
6·25전쟁 때 국군과 유엔군이 치른 전투는 약 233개이다. 군사전문가들은 이들 전투 중에서 10대 전투를 선정했다.
이의 기준은 승패에 관계없이 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준 전투, 피아 주력이 지향된 결전성격의 전투, 전투능력과 생존성 등이었다. 그 중 백 장군은 6·25전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다부동전투와 평양탈환작전에서 승리했다.
다부동전투는 피의 혈전인 낙동강에서 북한군 3개 사단에 맞서 국군 1사단을 주축으로 한미연합군이 엄청난 희생을 바탕으로 일궈낸 값진 승리였다.
백 장군의 평양 선봉 입성은 경쟁 부대인 미1기병사단에 비해 기동력이 떨어진 국군 1사단이 밤낮으로 발이 부르트도록 걸으며 싸운 피나는 결과였다. 이때부터 미군은 국군을 신뢰했다.
또한 백 장군은 중공군 침공으로 유엔군이 철수할 때 국군 사단 중 유일하게 1사단을 온전히 철수시켰고, 유엔군의 재반격 시 서울을 재탈환한 1사단을 지휘했다.
이로써 그는 적도(敵都) 평양과 서울을 탈환한 유일한 지휘관이 됐다. 최고의 사단장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어 동부전선의 1군단장 시 그는 고성 남방까지 진격해 동해안의 휴전선을 북으로 올리는데 기여했다.

■ 재빨리 판단하고, 신속히 결행
그의 전공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전선에서의 정규 작전뿐만 아니라 후방에서의 대게릴라전에도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했다.
1951년 말 그는 지리산 일대에서 준동하는 공비들을 소탕하라는 임무를 받고 백야전전투사령관에 임명됐다.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이 백 장군을 공비토벌사령관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군인으로서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셈이다.
백 장군은 자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았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백 장군은 지리산 일대의 공비를 단기간에 섬멸하여 후방을 안정시켰다.
이른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지리산 일대의 공비들을 소탕하여 대한민국의 안전한 땅으로 돌려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백 장군을 군단장에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고, 그것도 부족하여 다음해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시켰다.
백 장군은 패배를 모르는 장군이었다. 그의 작전 지도의 요체는 먼저 승리할 여건을 만든 후에 전투하는 것과 상황을 재빨리 판단하고 확신이 서면 신속히 결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역대 명장들의 승리 비결과 상통한다.
또한 백 장군이 승리할 수 있는 이면에는 뜨거운 부하 사랑이 있었다. 그는 전쟁 중 모두 한두 번씩 갔다 온 미국 유학을 한 번도 가지 않은 유일무이한 지휘관이었다.
또 유일하게 전쟁 초기부터 최장수 전투사단장, 군단장, 공비토벌사령관, 군단장을 거쳐 육군총수인 참모총장에 오른 입지전적인 장군이었다. 그는 오로지 한 계단씩 묵묵히 밝고 올라가는 군인의 길로 여기고 행동했다.
나아가 그는 미국이 낳은 최고의 영웅들인 맥아더, 리지웨이, 워커, 밴플리트, 테일러 장군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으며 한국군 최고의 야전지휘관으로 성장했다.

■ 철저한 대비 후 그대로 실행
백 장군은 결코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다. 그는 기회가 왔을 때 평소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을 빈틈없이 그대로 수행했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기회가 왔을 때 이를 적극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거나 실패했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했다. 여기서 기회라는 것은 다른 말로 위기였다. 6·25전쟁 중 그에게는 많은 위기가 찾아왔다.
개전 초기부터, 지연전, 낙동강 방어선에서 사단장 진두지휘, 미군과의 연합작전, 평양탈환작전, 1군단장시 대관령 견부 학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2군단의 재편성, 육군참모총장 시 금성전투 지휘, 휴전 후 1야전군 창설, 한국군 현대화 추진 등은 처음에는 그에게 위기였으나, 그는 이 모든 것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군과 자신의 발전에 보탬이 되는 좋은 기회로 만들었다.
백 장군의 장점은 다른 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평시 나폴레옹이 그랬던 것처럼 앞일을 미리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 놓았다가 실제 상황에 부딪쳤을 때 그대로 실행했을 뿐이었다.
오로지 군을 위해 한 시도 쉬지 않고 꾸준히 노력했던 것이 결국은 본인에게 이익이 되어 돌아왔을 뿐이다. 그러한 결과가 6·25전쟁을 통해서 뛰어난 전공과 업적으로 나타났다.

■ 고인에게 무한한 경의와 감사를…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그의 곧고 올바른 마음가짐과 타인에 대한 넉넉한 배려가 숨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더 없이 엄격하면서도 남에게는 관대했다. 이런 백 장군을 두고 세인들은 덕장(德將)으로 평가한다.
백 장군은 1960년 연합참모본부총장(현 합참의장)을 끝으로 14년간의 군 생활을 마감하고 육군대장으로 전역했다. 14년 중 10년을 장군으로 활약했고, 절반에 해당하는 7년을 대장 계급장을 달고 활동했다.
그 후 그는 자유중국 대사, 프랑스 대사 겸 유럽 및 아프리카 13개국 대사, 캐나다 대사, 교통부 장관, 국영기업체 사장, 성우회 회장, 한미안보연구회장, 6·25전쟁50주년기념사업회장, 육군협회 회장을 지냈다.
2013년에는 명예 미8군사령관에 임명됐다. 한국 사람으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미군 역사에서 외국군이 어떤 형태로든 미군의 지휘관이 된 적이 없었다.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그의 역할과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미국이 이를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한미동맹을 위해서 잘된 일임에 틀림없다. 국위선양에 크게 기여했다.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의 나라사랑과 군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에 대해 무한한 경의와 감사를 표한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