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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병대의 태평양전쟁 ‘승리의 상징’

기사승인 2020.02.17  17:4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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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지마전투(1945.2.16.~3.26.)

AP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이 촬영한 1945년 퓰리처상 수상작.

■ 가장 처절했던 전투
이오지마는 도쿄 남쪽 1,080킬로미터, 괌 북쪽 1,130킬로미터에 위치하고 있다.
이오지마는 가잔 열도에 속하는 화산섬으로, 섬의 표면이 대부분 유황의 축적물로 뒤덮여 있는 유황섬이다.
태평양전쟁 전에는 유황의 채굴이나 사탕수수 재배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주민이 1천여 명 정도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1941년 진주만 폭격 당시, 해군 전투대 약 1,200명과 육군 병력 약 3,700명을 인근 지치지마 섬에 배지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가 이오지마를 관할하고 있었다.
개전 후에 남방 전선과 일본 본토를 묶는 항공 수송의 중계지점으로서 이오지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 해군이 이오지마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미군 태평양 통합작전본부는 이오지마를 점령, 일본군의 항공기지를 파괴한 뒤 미군의 전진 항공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이오지마 공격을 결정했다.
1945년 2월 19일, 미군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해 내륙을 향해 진격하자 일본군 보병과 포병 벙커의 맹렬한 포격으로 태평양전쟁 중 가장 처절한 전투가 시작됐다.
35일 동안 계속된 전투에서 미군은 전사자 6,821명, 부상자 21,865명의 피해를 입었고, 일본군은 20,933명의 수비 병력 중 20,129명이 전사했다.

■ 역사에 길이 남다
전투 개시 4일째인 2월 23일, 미 해병대는 섬의 남쪽에 있는 스리바치산을 손에 넣은 뒤 정상에 올라 성조기를 게양했다.
처음 성조기를 게양한 것은 해병대 기관지 ‘레더넥’의 카메라맨 루이스 로워리 하사가 촬영했지만, 성조기의 크기가 너무 작아 기존의 것은 대대 소유물로 반납하고 다시 한 번 게양했다.
그리고 두 번째 게양할 때 AP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이 카메라에 담은 사진이 1945년 퓰리처상 수상작이 됐다.
조 로젠탈은 전쟁 중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신중을 기해 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는 이오지마 상륙 5일 후 해군장관을 촬영하기 위해 배에 있던 중 한 해병대 소대가 스리바치산에 올라 성조기를 게양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사진과 영상을 담당하는 2명의 해병대 사진병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산 정상에서 성조기를 파이프에 묶고 있는 해병대원들을 만난 그는, 촬영 지점을 찾아 성조기가 바람에 펄럭일 때 단 한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역사에 길이 남는 태평양전쟁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고명석 기자】

■ 이오지마전투(1945.2.16.~3.26.)
태평양전쟁이 말기로 치닫던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에 상륙을 시작했다.
일본 열도의 작은 섬인 이오지마를 향후 공습을 위한 공군기지로 사용하기 위해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일본은 병력을 2만 1천 명 이상으로 늘리며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이오지마전투는 태평양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됐다.
2월 23일 미 해병대는 섬의 남쪽 스리바치산을 확보하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일본 영토에 최초로 외국 국기가 휘날린 순간을 놓치지 않은 AP통신 사진기자 조 로젠탈은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3월 17일, 미군은 섬을 장악했으며, 거의 모든 일본군 부대가 전멸했다.

고명석 기자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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