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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사나이, 김만성(해병 192기) 전우

기사승인 2019.12.02  11:5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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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성 전우

■ 가난뱅이, 무학자가 해병대 나오다
1947년 김만성은 서울과 가까우면서 낙후된 일산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오직 농업만 하던 곳이어서 농토가 없는 김만성 집안은 가난하여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닐 수가 없었다.
부득이 1957년 11살 때 초등 4년을 중퇴하고 파주 제1전투단 헌병 파견대로 찾아가 심부름꾼이라도 시켜달라고 부탁, 일명 ‘쑈리’ 생활을 하면서 납자보리와 부식을 얻어 자신과 식구들이 끼니를 연명했다.
어느 날 세무워커에 ‘불광’을 내려다 그만 가죽이 오그라드는 바람에 되게 얻어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군에 갈 나이가 되어 해병대 지원을 했으나 무학자여서 안 된다기에 그 자리에서 “아~아~ 상륙전가”를 힘차게 부르며 해병대에 가고 싶다고 하여 “합격!”의 영광을 얻어 해병 192기로 입대했다.
그때가 1967년 무더운 8월 삼복더위였는데 해병대는 물에서 훈련을 받으니 “까짓, 무엇이 문제냐”고 방심했다가 삼복더위에 겨울 내복을 껴입고 연병장을 뛰는 초인적 상황을 극복하느라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랐다.

■ 극성스럽고 건실하게 살아온 성공스토리
실무 배치 후 13개월만인 1968년 상병 계급으로 동기생들이 귀국선에 오를 때 월남에 도착, 소총분대로 배치 받아 하마터면 후배들에게 ‘빳다’ 맞을 뻔 했다.
왜냐하면 계급장 없는 월남전 ‘고참’이 “설마 선임이랴” 했다가 선배 기수인줄 알고 즉시 꼬리를 내렸다.
제대하여 고향 일산에 들어와서 연탄 배달부터 석유 장사까지 극성스럽게 살았다.
12년간 골프장 일용직에 근무하면서 결혼하여 아들, 아들, 딸 삼남매를 낳아 행복하게 살다가 고향으로 들어왔다.
그때 누가 자갈밭을 사라고 해서 동네 사람 보증으로 외상 구입하여 6년 동안 땅값을 완불하였는데 나중에 일산이 개발되면서 돈이 되었다.
지금은 약간의 토지를 갖고 그곳에 창고 8동을 지어 임대료를 받으며 평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 나의 인생은 오직 해병대다
1992년 제2대 고양시해병대전우회장에 취임, 5년간 역임했고 고양시재향군인회 부회장을 거쳐 회장직까지 8년간 봉사했다.
김만성 노병은 일산 토박이로 맨주먹으로 일어선 의지의 해병대로 이름이 나있다.
2005년에 월남전 고엽제로 뇌경색을 맞아 쓰러지기도 했지만 해병대정신으로 능히 이기며 살고 있는 중이다.
“나는 11살 때부터 해병대였습니다. 나의 인생은 오직 해병대입니다” 말하는 김만성 노병의 눈빛은 청룡이 뿜어내는 이글거림이었다. 【신동설 발행인】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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