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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전쟁 ‘개전(開戰)의 기억’

기사승인 2019.06.13  13:4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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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군을 처음으로 직접 본 새벽

▲ 이상규해병 71기,

하교 7기해병대

9·15인천상륙작전기념사업회 총무

새벽 4시 지축(地軸)을 흔드는 군인들의 집단 행군소리에 잠이 깼다.
옆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먼저 깨시어 길 쪽으로 난 창문을 살짝 보시더니 황급히 내게 이불을 씌워 주시면서 숨어 있으라 하신다.
나는 불안한 가운데 무섭기도 했지만 호기심에 무슨 소린가 하고 창문 밑으로 숨어서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인민군 100여 명이 따발총을 앞에 든 채 무리지어 시내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30여 미터 간격을 두고 또 한 무리가 따라 가고 있었다.
내가 인민군을 처음 본 것은 그날 1950년 6월 29일 새벽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쳐들어 왔다는 전쟁 소식은 라디오 방송을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피난을 간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불안 속에 갈피를 못 잡고 떨고만 있는 상태였다.
방송에서는 우리 국군이 의정부에서 적군을 격퇴하고 북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방송을 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도, 이승만 대통령도 국민과 함께 서울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그게 어제였다. 그런데 오늘 새벽 인민군 수백 명이 무리지어 무장한 채로 우리 집 앞길을 지나 인천 시내 쪽으로 진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 집은 인천 동구 송현동 인천중공업 공장 앞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바닷가 근처로 시내에 나가려면 수문통(水門通)을 지나 도보로는 30~40분이 걸려야 동인천역에 닿을 수 있는 변두리였다.
나는 다시 화수동에 있는 중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학교에 가보니 수십 명이 모여서 무슨 노래를 배우고 있었다. 처음 듣는 노래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銀) 금(金)의 자원도 가득한......”
북한의 노래였다. 나는 뒤에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나와서 다른 곳으로 가서 상급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았다.
거기에는 ‘두목’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선배가 의용군으로 가자는 부추김을 하고 있었다. 한편 다른 구석에서는 우리도 국방군에 가야한다고 열을 내는 선배도 있었고, 그냥 피난이나 가자는 무리도 있었다.

■ 피난 떠나 소식 들은 인천상륙작전
나는 겁도 나고 무섭기도 해서 집을 와버렸다. 집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행방이 묘연하셨다.
인민군이 총을 들고 와서 집집마다 동네 사람들을 전부 데리고 갔다는 것이다. 결국 의용군으로 강제로 끌고 간 것이었다.
우리는 할머니를 재촉해 고모와 같이 피난을 가기로 했다. 쌀과 옷가지를 대충 짐을 챙겨 등에 매고 남쪽을 향해 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충남 공주 사곡면 큰 고모님 댁이다.
저녁 무렵 우리는 안양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가 떠나올 때 한길에는 수많은 피난민 대열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지게에 쌀자루와 이불, 옷가지 등을 지고 가는 사람, 리어카에 이불과 옷 등 살림살이를 싣고 가는 사람, 짐자전거에 산더미처럼 짐을 싣고 타지도 못하고 끌고만 가는 사람 등….
서울 쪽에서 간간히 포성이 들릴 때는 가던 발길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어느 때는 평택 쯤 쪽에서 많은 포성이 날 때도 있었고 비행기 소리도 났지만 우리 피난민 대열에는 그 누구도 제재를 하거나 상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일주일 만에 큰고모님 댁에 도착했다. 그곳은 차령산맥 지류의 끝자락에 무성산이라는 인적미답의 깊은 산 뒤에 숨어 있는 동네로서 천혜의 가장 안전한 피난처였다.
우리는 피난 도중 인민군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들리는 소문에는 전황이 날로 불리해져 간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UN군의 맥아더 장군이 9월 15일 날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여 UN군과 국군이 서울을 탈환하고 일로 북진을 계속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 저녁에 이웃동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우리가 있는 마을로 몰려오면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는 게 아닌가.
어떤 사람은 손에 태극기가 들려 있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한데 어우러져 부둥켜안고 춤을 추었다.
어디선가 술독이 나오고 어른들은 저마다 한껏 술이 취해 밤늦도록 맥아더 장군 이야기에 그칠 줄 몰랐다.
이것이 아직도 생생한 6·25전쟁의 개전(開戰) 당시 기억이다.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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