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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 6기 동기회(회장 김광식) ‘제67회 정기총회’ 실시

기사승인 2018.11.29  15: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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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줄 좌측부터> 신지성, 염석균, 김광식 회장, 조윤환 총무, 윤영복, 이승규, 이재수 <윗줄 좌측부터> 김평일, 김현생, 문시화, 문완수 감사, 백계현, 선하겸

해병 6기 동기회(회장 김광식)는 지난 11월 24일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수림공원가든에서 제67회 정기총회를 실시했다.
이날 눈이 오는 등 날씨가 좋지 않아서 연로한 6기생 전원이 참석 못하고 13명이 모였다.
김광식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궂은 날씨 속에서도 동기들의 얼굴을 보고자 지방에서도 참석해준 동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며 “우리 동기들은 이제 점점 우리 곁을 떠나는 동기들이 늘어나고 몸이 불편해 참석 못하는 동기들이 많아 분통하고 원망스러운 마음도 든다”고 말했다.
또한 “우리가 입대한 지가 67주년이 된 만큼 16~18세에 입대할 당시 청년은 어디로 가고 백발이 휘날리는 나이가 되었다”며 “얼마 남지 않은 여생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는 마음으로 참석해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동기 여러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지금까지 동기회를 이끌어 왔다”며 “동기들의 도움에 감사드리고 건강도 잘 챙겨 동기회에서 계속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온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길 바란다”고 인사를 전했다.
6기 노병들은 대부분 인천 지역에서 거주했던 이들로 학도의용대로 조직돼 해병대 입대, 6·25전쟁에 참전해 도솔산전투, 924고지전투, 장단·사천강지구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800명이 입대를 했으나 500여 명 이상이 전사 및 행방불명됐으며, 100여 명이 제대 후 사망했다.
처음 6기생 모임 당시 180여 명으로 시작한 동기회는 지금 현재 83명이 명단에 있고 생존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모임에는 30여 명이 참여하고 있다.
6기생들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도솔산, 군산, 통영·마산, 인천상륙, 서울수복, 장단·사천강 등 전승기념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

김광식 회장

■ 해병 6기 노병들의 한마디
해병은 정신이 죽으면 군이 될 수 없다.
도솔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고생했으나, 해병대정신으로 살았다.
후손들에게 해병대정신을 계승시켜야 한다.
해병대정신으로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이충무공의 임전무퇴 이상을 본받고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 살 것이다.
살면서 정직하고 남에게 피해를 안 주며 살아왔고 해병은 해병다워야 해병이다.
전쟁 중에 죽으면 해병대원이라는 식별을 위해 팔에 해병대 앵커 문신을 했다.
선배 해병들의 정신을 후배 해병들도 계승·발전시켜 이어나갔으면 한다.

○ 해병 6기생들이 전하는 6·25전쟁

■ 인천학도의용대 결성
6·25전쟁이 발발하자 두 달여 만인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9월 말 인천 전역에 있는 14~18세의 어린 학생 3천여 명으로 구성된 ‘인천학교의용대’가 결성됐다.
인천학도의용대원들은 인천 지역 치안과 피란민을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천이 또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인천학도의용대는 “나라가 있어야 배울 수 있다”며 “우리도 전투에 참여하자”고 결의를 했다.
1950년 12월 18일 인천에서 중학교(당시 6년제) 학생들로 조직된 인천학도의용대 대원 3천여 명은 이 당시 중구에 있던 축현국민학교에 모여 출정식을 마치고 고향 인천을 떠나 1차 집결지인 대구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행군은 도원고개를 넘어 남동쪽으로 가서 안양까지 밤을 새워 걸어가는 고난의 길이었다.
이튿날 수원으로 가서 일부는 화차 지붕에 올라가 남하했지만, 대부분 걸어서 대구까지 이동했다.
당시 대구로 거처를 옮긴 육군본부로부터 영장이 아닌 대원증을 발급받은 인천학도의용대원 2천여 명은 다시 마산·통영·부산 등으로 흩어져서 이동했다.
그 당시 1,400여 명은 육군으로 입대하고, 600여 명은 마산에서 집결하여 해병대 모집에 지원 입대하고, 다음날 1951년 1월 5일 해병 신병 모병관이 신병 모집에 지원한 사람들은 진해까지 오라고 했다.

■ 해병 6기는 ‘인천 기수’
6기생들은 진해를 향해 창원고개를 넘어 야간행군으로 밤늦게 자정 넘어서 진해 경화동 경화국민학교에 도착했다.
해병 6기 입대식은 800명 중에서 600명이 인천학도의용대 소속이고 200명은 서울 및 각 지역에서 자원입대한 일반 지원병으로 구성됐고, 특히 50여 명의 수송 반은 10년 이상 운전 경력이 있고 나이가 많은 이들로 구성됐다.
1951년 1월 8일 가입교를 해서 사격훈련만 받다가 1월 24일 정식으로 해병 6기로 입대식을 했다.
흔히 해병 6기는 ‘인천 기수’라고도 말하는데, 정말로 대부분 인천 지역 중학생들이었다.
그때 당시 중대장들은 간부후보생 3기가 소위로 임관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중대장을 했다.
1중대부터 7중대까지는 인천학도의용대원으로 구성되고 8중대는 서울 및 각 지역에서 자원입대한 병력으로 구성되어 훈련을 받았다.
훈련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훈련으로 팬티 바람에 연병장에 집합한다든지 바닷물에 들어가게 한다든지,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면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고 노병들은 전했다.

■ 다시는 전쟁 아픔 겪지 않기를…
1951년 2월 10일 3주간의 고된 신병 교육을 마친 6기생들은 보병 400여 명과 포병 400여 명으로 나뉘어 보병은 즉시 전방 도솔산과 924고지 전투 지역으로 출동했고, 포병은 그날로 진해에 새로 생긴 제1포병대대에 배치 받았다.
당시 해병대에는 포병부대가 따로 없었으며 처음으로 창설된 해병대 포병대대에 인천 지역 중학생 출신 해병 6기생들이 포병대 창설요원으로 선발된 것이었다.
포병으로 배치를 받은 6기생들은 육군포병학교에서 6개월간의 포병 교육을 받고 1951년 11월 강원도 양구지역 전투현장으로 출동하여 도솔산지구전투, 924고지전투 등에 참전했다.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6기생들은 장단·사천강지구전투에서도 수도권 방어를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에 참여한 6기생들은 이때 처음 지급된 화염방사기를 사용하다가 많은 동기생이 전사했다.
“총탄이 빗발치고,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수 없이 수많은 시체 속에서 전쟁을 치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며 “다시는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노병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박흥배 보도국장】

김광식 회장 인사말

 

 

박흥배 기자 phb7439@hanmail.net

<저작권자 © 무적해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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