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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각인된 ‘해병대정신’으로 해외 건설현장 누비다

기사승인 2018.11.29  1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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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레이시아해병대전우회(회장 정유명·해병 601)

쿠알라룸푸르 공사 현장에서 정유명 회장과 장하정 해외특파원.

말레이시아 경제가 번영하던 1970년대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교민들이 이곳에 진출해 경제 활동을 했다.
한인들은 진출 소속 기업들의 주재원들 이외에 제조업에 종사하거나 식당을 비롯해 한인을 상대로 하는 각종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그 후 주변국인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의 저임금 노동력에 편승하기 위해 이곳에 있던 한국 제조공장들이 대거 이전함에 따라 자연히 한국인을 위한 서비스업이 위축됐다.
현재는 대기업, 학교, 그리고 요식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는 적은 수의 교민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재(在)말레이시아 해병대전우회 회원 역시 감소되는 바람에 과거에 봉사해 왔던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마약퇴치 캠페인과 한글학교 운영 등 사회활동이 부진하게 됐다.
현재 말레이시아 해병대전우회 회원들은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똘똘 뭉쳐서 친목도모와 광활한 지역 간의 정보 교환, 새로운 회원 영입에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현재 정유명(해병 601) 전우가 회장을 맡고 있으며 이종현(해병 733) 사무국장, 손동만(해병 747) 총무가 합심 봉사하면서 전우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전우회를 찾아올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또 그들이 잘 찾아왔다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기 모임 시 상품증정 이벤트 방안 등 아이디어를 짜 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정 회장은 삼성물산으로부터 수주를 받아 쿠알라룸푸르의 상징인 쌍둥이빌딩 바로 근처에 3동의 60층짜리 거주형 콘도 건물을 짓고 있다.
이제 거의 공사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으며 이 건물이 완공되면 쌍룡건설로부터 수주를 받아 또 다른 빌딩을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말레이시아전우회의 활성화는 젊은 회원들의 활동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정 회장은, 현재 공사를 총 감독하면서 바쁜 일정에서도 젊은 회원 영입에 동분서주하고 있다.

청해부대 임무를 마치고 귀국하는 이순신함에 탑승한 해병들을 초청하여 격려연을 가진 정유명 회장(흰모자 착용).
좁은 공사 현장에서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과거 IBS 헤드캐링을 연상한 방식을 적용, 작업효율성을 높였다.

■ 해병대가서 정신 차리자
진주에서 성장한 정유명(해병 601) 말레이시아전우회장은 고교 시절, 이름처럼(무단결석에 싸움이 그칠 날 없는 문제 학생으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직선적 성격과 과묵형으로 태권도 3단 유단자인 그에게 주변의 친구들이 끊임없이 도전장(?)을 던졌고 그때마다 일일이 대응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학업은 점차 멀어지고 결석이 잦아지게 됐다.
고교를 졸업하자 아버지와 해병대 출신인 큰형이 해병대에 들어가서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사람이 되어 돌아오라고 권유하여 해병 601기를 지원했다.
하지만 실무에 배치된 후에도 선임에게 순순히 응하지 않다보니 ‘문제 사병’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심지어 그가 휴가를 앞두고 있을 때에는 중대선임하사가 며칠 전부터 휴가 중에 사고치지 말라고 집중 관리를 할 정도였다.
제대 후 한동안 방황하다가 맘을 굳게 먹고 대학교를 입학하려고 하였으나 고교 시절의 생활을 문제 삼아서인지 한 군데도 입학을 허락해주는 데가 없었다.

■ 해병대정신이 가슴을 찔렀다
그래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빈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무언가 날카로운 메스가 가슴을 쩍 벌린 후 ‘해병대정신’이라는 것을 심장 한가운데 각인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내가 지금 내 처지를 비관하고 계속 빈둥거리면 나의 인생은 비참하게 된다. 내가 배웠던 해병대정신이면 무엇인들 못하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밑바닥부터 시작하겠다’고 작정하고, 맨 처음 알루미늄 공장에 들어갔다.
그는 단순하게 시키는 일만 반복한 것이 아니라 사장한테 “사장님 월급은 반만 주세요. 대신 알루미늄 가공 기술을 가르쳐 주십시오”고 부탁하자 사장은 흔쾌히 대답, 가르침을 받았다.
어느 날 공사장에 알루미늄을 납품하러 갔는데 그곳에 젊은이 한 명이 “알루미늄이 불량”이라며 모두 가지고 가라고 호통을 쳤다.
옆 사람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건축기사라고 하였다.
그 순간 자신도 그 사람처럼 큰소리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병대는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즉시 건축기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하여 대망의 건축기사가 됐다.
그리고 당당하게 ‘건축기사님’으로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회사 추천으로 대학교 토목과를 들어가 졸업하여 최종적으로 명지대학원 문화재학과를 졸업했다.

■ 지혜롭고 담대하게… JD건설 창업하다
8년 전, 대우건설의 직원으로 말레이시아에 왔다가 퇴사하여 건설 회사를 창업하여 독자적 운영을 하기 시작했다.
막상 건설사를 시작하고 보니 사막에 홀로 내버려진 느낌이었다.
초창기에는 하루 식사를 해결할 돈이 없을 정도로 궁핍하기도 했지만 신병 훈련 때 지옥주 훈련을 버티면서 견뎌 낸 상황을 떠 올리며 오기와 악으로 버텼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시 말레이시아 현지의 한국 건설사 현장소장을 찾아가 일을 맡겨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 무관심한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매일 찾아가 부탁했지요. 그랬더니 어느 날 조용히 저에게 말하더군요. 곧 본사에서 임원이 현지를 방문하는데 그 분에게 부탁해 보라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현장소장은 한 달 동안 매일 찾아 간 제 열정을 보고 믿음이 생겨 회사에 미리 조치를 해 둔 상황이었더군요.”
드디어 공사를 따낸 정 회장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과 같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각오로 공사에 임했다.
그러나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동남아인들이었다.
그들의 일하는 방식을 감안해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계약일자 내에 공사를 마무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지에 진출해 있던 우리나라의 건설사들은 공통적으로 그러한 문제로 인해 종종 곤혹을 치르곤 하였다.
그러한 문제를 이미 잘 알고 있는 정 회장은 자신의 방식으로 문제를 헤쳐나갔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는 군대 생활을 하면서도 문제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합리한 선임들에 대해 반항했을 뿐,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마저 팽개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선임이 되자 어려운 조건에서 후임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하게 되었지요. 당시 터득한 가장 좋은 방법은 끈끈한 전우애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끈끈한 해병대전우애가 회사 일으켜…
“저는 비록 감독자이지만 현지 노동자들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같이 땀 흘리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생일이나 가정문제 등과 같은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었지요. 그랬더니 점차 마음을 열고 다가와 주더군요. 그래서 날씨가 무덥고 힘들지만 공동목표를 향해 달려 나가는데 모두 공감해 주고 따라주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하청을 받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지금은 하청을 골라서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비결은 ‘주어진 기간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있는 회사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는 공사장에서 인부들과 눈을 마주하며 눈웃음을 나누었고 어깨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격려해주는 모습을 기자는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딱딱한 회의장이 아닌 식사하는 장소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업무를 토의하는 분위기도 보였다.
그가 지휘하고 있는 건설 현장은 24시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기지와 함께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도 그의 휴대폰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야간 현장에서 몇 명의 노무자가 어떤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문자였다.
“동남아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문화를 정착시키기까지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들을 신뢰를 하지 않으면, 제가 모든 것을 다 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저도 지치고 일은 일대로 안 됩니다. 이들에게 명확한 목표와 확실한 동기와 책임감을 부여하면 체계적인 업무 수행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정 회장의 아들(기수와 이름) 역시 금년 1월 해병대에 입대, 현재 1사단에서 근무하면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2018년 1월에 신병훈련을 받던 아들 기수들이 한 겨울에 바닷물로 뛰어드는 장면을 보고 아내가 기겁을 하였지만 오히려 뿌듯했다고 한다.
“저는 아들에게 해병대에 입대해서 딱 두 가지만 제대로 배워 오라고 당부했는데, 첫 번째는 나라와 해병대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두 번째는 악조건을 극복하고 도전하는 정신을 배워오라고 했습니다. 충성심을 기르면 어느 조직에 들어가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에 그 조직문화에 잘 적응하게 될 것이고, 세상에는 쉽게 주어지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없으므로 군 생활에서 도전하는 정신을 배우면 어려움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말을 물가로 끌고 갈수는 있어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듯이, 해병대정신은 해병대에서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여건만을 만들어 줄 뿐, 결국은 본인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가 현지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자 해병대 후배들이 찾아오곤 했는데 “어느 후배님이 간곡히 일자리를 부탁해 소개했지만 얼마 지나고 나니 가타부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생면부지의 이역만리 타국에서 적응하려면 다소 힘들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한편으론 이해도 가지만 힘들다고 말도 없이 그만 두면 무엇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모습을 보여야 신뢰감을 줄 수 있는데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 같아서 매우 아쉬웠습니다.”며 아쉬움을 말했다.
“인생에서 마주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가장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스스로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빗물을 받아서 사용하려고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비가 올 때를 대비해 작은 컵을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큰 대야를 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 준비는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 스스로 해나가야 하며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바로 인내와 도전정신입니다. 여러분이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인내하면서 도전이라는 노크를 하면 세상이라는 집주인이 기회라는 문을 열어 대답해 줄 것입니다. 이곳 말레이시아도 기회가 많습니다. 방문을 언제든지 환영하며 도움이 필요하면 기꺼이 도와드리겠습니다.”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는 60층 건물 옥상에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그의 정수리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자연과 자원의 보고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말레이 반도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는 서말레이시아와 보르네오섬 북서부를 차지하는 동말레이시아로 이루어져 있고,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다.
인종은 세계 주요 항로 중 하나인 말라카 해협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분포를 보인다.
말레이시아는 대부분 열대우림으로 덮여 있어 수목작물, 특히 고무와 야자유가 가장 중요한 환금작물이며 석유 생산과 주석 채굴이 제1의 외화 획득원이고, 시멘트와 전자·고무·철강제품 제조업 역시 국가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입헌군주제로서 국왕이 국가를 대표하고 정부를 이끄는 수반은 총리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 번영이 시작되다가 1990년대 중·후반 지역적 경제 침체를 겪기도 했지만 이후 다시 회복됐다.
우리나라와는 1960년 2월에 수교를 맺었고, 현재 한인은 1만 4천여 명(2016년 기준)이 거주하고 있다.  취재 : 장하정 취재본부장겸 해외특파원

 

무적해병신문 rokmc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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